오지 않을 날
오지 않을 날
  • 경북 김천의 유기농사꾼 이근우씨
  • 승인 2019.10.04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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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농사를 짓기 위해 덤바우로 이주해왔던 15년 전에는 우리 마을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시내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도 방과 후에는 거의 매일 아버지의 우사에 들러 소를 먹였습니다. 주말이면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양파수확을 거들거나 어른들 몰래 트랙터를 운전해 소똥거름을 뒤집기도 했습니다. 어린데도 맡은 일은 암팡지게 해냈습니다.

“공부나 하라는데도 저래요.”

아이의 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사료를 나르는 아이 뒤에 대고 변명하듯 중얼거렸습니다.

“농사 물려주기는 싫잖아.”

제가 실없이 이런 말을 꺼내면 씩 웃으며 살짝 한숨짓는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제가 마을 저수지에서 낚시나 하자고 아이를 꼬드긴 적이 있습니다. 지나던 길에 아내가 보니까 심통이 난 것 같아 함께 놀아줄 작정이었죠.

“농사 힘들지?”

“어휴, 아빠가 허드렛일만 시켜서 짱 나요. 농사는 안 시키고...”

“진짜 농사짓게? 공부해서 대학 안 가고?”

“재미있잖아요.”

그러는 아이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을 보며 저도 아내도 설마 했습니다. 좀 더 크면 팔십 노인들만 그득한, 또래도 없는 외진 마을에서 단조롭기 짝이 없는 농사일에 싫증이 나서 도시로 달아날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낚시도 재미있는 모양이네.”

“네. 나중에 크면 낚싯대 사가지고 같이 해요, 아저씨.”

“그러자. 막걸리도 한잔 하면서.”

막걸리 얘기에 으쓱했는지 아이답지 않게 껄껄 웃던 아이의 웃음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아이는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짐작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소를 먹이고 농사를 짓습니다. 마을을 지나다가 트랙터를 몰고 가는 그 청년과 마주칠 때면 듬직하고 괜히 뿌듯합니다. 이 청년은 우리 마을의 마지막 아이이자 유일한 청년인 것입니다.

“안 힘들어?”

“힘들어요. 아빠가 일이란 일은 죄다 나더러 하라고 해요.”

여전히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제는 농담도 할 줄 압니다.

“예쁜 녀석.” 아내의 이 표현 외에 다른 말은 필요 없군요.

 얼마 전 청년의 아버지가 덤바우에 올라왔습니다. 씩 웃다가 살짝 한숨짓고 나서는 주섬주섬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우사신축에 찬성 서명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사 짓는데 왜 서명이 필요해요?”

아내가 정색을 하자 마을 주민 일부가 신축을 드세게 반대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공청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해서 아내와 저는 몇 마디 말이라도 거들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인 그 청년 몫으로 짓는 우사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며칠 후, 공청회를 목전에 두고 아버지와 아들은 우사신축을 포기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안타깝고, 착잡하고 화도 좀 나고 그랬습니다.

 “딴 데 알아봐 놨어요.”

청년은 헤벌쭉 웃으며 이렇게 한마디 하더군요. 우리 마을의 마지막 아이이자 유일한 청년이 마을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문득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저 청년의 미래가 아니라 청년 없는 마을의 황폐한 미래가 뇌리에 스쳤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청년일 저 청년과 낚싯대를 드리우고 막걸리도 한잔 나누며 껄껄 웃어볼 날이 다시는 오지 않겠군요.  

농업인신문, NONGU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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