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규섭(별총총 달휘영청 소뿔농장 대표)

20년 가까이 농사를 지어보니 어떤 작물이든 생산은 할 수 있는데 판로를 찾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주위의 농민들이 자주 이런 비슷한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모두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유기농업 농민들이 겪는 판로의 어려움은 더 심각하다. 유기농산물은 일반 유통에서 요구하는 농산물 품위 기준에 훨씬 미달하기 때문에 일반 유통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친환경 학교급식이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등 유기농산물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으로 판로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2001년, 우리 지역에서 유기농업을 하던 농민들의 공통된 고민도 판로 개척이었다. 한 농민이 우리 손으로 직접 생협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유기농산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생협을 농민들이 직접 만들자는 것이었다. 우리 지역에 생협이 있으면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기 때문에 유기농이 추구하는 가치에도 맞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농산물을 팔기 위해 유통업자들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고 다녔는데 생협을 만들면 더 이상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크게 끌렸다.
 
농민들이 직접 인근 도시를 다니면서 소비자들을 만났다. 몇 달 후 농민들의 뜻에 공감하는 수십 명의 도시 소비자들이 지역 생협 설립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모인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우리가 만들 생협의 겉모양과 내용을 채우는 토론을 저녁마다 이어갔다. 매일 밤 토론을 마치면서 우리가 만들 생협의 원칙이 하나씩 정해졌다. 당시 치열하게 논쟁하였던 몇 가지 주제는 지금도 여전히 생협과 생산자들 사이에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농산물 가격은 생산자가 결정한다. 생협 소비자는 안전한 농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기를 원하고 생산자는 농산물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제값받기를 원한다. 서로 반대 입장이다. 지금까지 중간 유통업자들의 가격 후려치기에 당해왔던 농민들은 우리가 만드는 생협의 모든 농산물 가격은 농민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비자 측 입장에 선 사람들도 농민들의 강한 주장에 반박하지 못하고 동의했다. 농민들은 몇 가지 약속을 더 보탰다. 계절 요인으로 일반 시장의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더라도 우리 생협에서는 미리 약속한 가격 이상으로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비자 측 입장에 선 사람들도 농산물 출하 성수기에 일반 시장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미리 약속한 가격 이하로 내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농민들은 가격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반품하지 않는 생협이어야 한다. 유기농산물이 비록 벌레 먹고 못 생겼지만 농민들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생산하였고 가장 안전한 농산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급하였는데 겉모양으로 판단하여 반품하는 것은 농민들의 사기를 꺾는 일이라는 것이다. 갑론을박, 반품에 대한 토론은 길게 이어졌다. 1차 농산물은 어느 정도 반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반품을 불허한다면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생협으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긴 시간 토론 끝에 지역 유기농업을 살리자는 대의에 동의하면서 반품 없는 생협을 만들기로 하였다.    

제철 농산물을 공급한다. 뜻은 좋지만 제철 농산물로만 생협 매장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시사철 모든 농산물이 차고 넘치는 게 현실이다. 우리 생협 매장은 늘 제철이 아니라는 이유로 진열대를 비워둔다면 소비자들의 발걸음은 끊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주장은 품목에 따라 재배가 불가능한 시기가 있는데도 소비자들은 지속적으로 출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비닐하우스가 늘어나고 화석연료 사용을 부추기는 일을 생협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재배 사양을 자세히 표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해, 우리 지역에 농민들이 만든 생협이 출범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다. 최대한 불편한 생협, 제철 농산물을 고집하는 생협 그리고 적자 운영이 불 보듯 뻔한 생협을 만든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생협은 원래 불편하고 결품이 많고 적자 내기 쉬운 곳이 아닌가싶다. 유기농업과 생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농민들은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생협 소비자는 농민들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구호는 생협이 늘 애용하는 구호이다. 생협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유기농업의 어제와 오늘이 보인다. 왜냐하면 유기농업과 생협은 긴밀하게 관계 맺으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농업인신문 6월 17일자 오피니언 칼럼 ‘인증유감’제하 내용 중, 영농일지에 ‘소똥’을 사용했다는 기록에 대해 인증규정 위반 사항이라, 단어를 지우고 수정해서 다시 유기인증 절차를 밟았다고 게재했었다. 그러나 인증기관 확인결과, 인근 축산농가의 소똥퇴비는 무항생제 인증임이 확인됐다. 결국 개인적 판단으로 영농일지를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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