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형’으로 존경받는 농촌지도자연합회 만들고 싶어

 

6.25 전쟁의 참화도 비껴갈 정도였다는 오지마을 청원군 오창면 성재리. 2005년부터 마을 인근이 오창산업단지로 개발되면서 오지마을은 벗어났지만 아직도 농촌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농촌지도자 충청북도연합회 박지환회장은 바로 이 마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농사일을 시작했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당시 전국 최연소 이장을 맡으면서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농민권익운동의 지도자로, 친환경 농업의 선구자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도 고향 성재리에 터를 잡고 열정적으로 농촌지도자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박지환회장을 만나봤다.

 

1986년에 지도자회 가입, 33년째 활동 중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농촌지도자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 아버지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방앗간을 운영하신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농사일에 익숙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 농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1979년에 4-H 회원이 된 후에 면 회장과 군 회장을 맡아 과학영농기술을 배우고 전파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 1986년에 농촌지도자 회원 가입한 후 33년째 활동을 하고 있다.

이 해에 농민후계자(현, 농업경영인)로도 선정됐다. 보통 농민후계자 활동을 어느 정도 한 후에 지도자회에 가입하는게 일반적인데, 기왕 농사짓기로 결심한 거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맘먹고 활동하다보니 한 해에 농촌지도자회와 농업경영인회에 동시에 가입하게됐다.

지금생각해보니 마을 이장직도 1986년부터 맡기 시작했으니 사실 내 인생의 중요한 모든 것들이 이 때에 다 시작된 것 같다.

 

삭발만 3번, 농민권익을 위해 앞장서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지금 얼굴과 달리 굉장히 강한 인상이다. 80년대 후반부터 농민권익 확보를 위한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다고 하던데.

-젊었을 땐 인상 때문에 함부로 곁에 다가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웃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게 1980년이다. 농사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다. 몇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선진농업기술도 배우고, 주변의 선배들도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농사에 필요한 정보 하나라도 더 배울려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농사에 대해 자신감이 생길 즈음, 우리 나라에 농산물 수입개방이라는 엄청난 위기가 닥치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UR협상 반대를 위한 농민대회부터 미국과의 쌀 협상 반대, WTO 비준 저지에 이르기까지 농민과 농업, 농촌을 지키기 위한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했다. 단순 참가자(웃음)로 시작한 농권운동을 한 해 두 해 꾸준히 참가하다 보니 어느새 지도자가 되어 있더라. 농권운동을 시작한 후 3번 정도 삭발을 했다. 상대적으로 젊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희생을 해서라도 수입개방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었다.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당시 수입개방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서서 활동했던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수입농산물로 인한 우리 농업과 농민의 피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친환경 농업에서 농업의 살 길을 찾다

 

90년대 초반, 당시에는 생소했던 친환경생명농업을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친환경 농업을 시작하게 됐나.

-농산물수입개방을 전제로한 UR협상 반대 활동을 열심히하고 다니던 중이었다. 어느 순간 이대로 대책없이 있다가는 앞으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다. 외국산 농산물 수입에 맞서 농사를 계속 지으며 살수 있는 방법이 뭘까 연구를 많이 했다. 그 때 생각난게 친환경농사였다. 아무리 수입농산물이 활개를 치더라도 우리 땅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키운 친환경농산물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친환경 농사를 시작했다.

 

왕겨농법과 우렁이농법 등 친환경농사기술을 직접 개발해서 전파하고 작목반을 통한 직거래 활성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친환경농업의 선도자로 인정받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 같은데.

-왜 어려움이 없었겠나. 지금은 친환경농법도 많이 발전하고 실제 친환경농사를 짓는 농민도 많아 졌지만, 당시엔 미친놈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당장 눈앞에 소출이 줄어드는게 보이는데 누가 쉽게 이해를 하겠나. 농민들의 신뢰를 얻기까지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2000년도 쯤인가, 주변 농민 16명과 유기농쌀 작목반을 만들고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판로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중간업자를 통해 남양유업에 유기농쌀을 납품하기로 하고 그 해 회원들이 수확한 쌀을 창고에 입고했다. 그런데, 중간업자가 쌀을 조금씩 납품 받고 쌀값도 제때 주지 않았다보니 내가 중간에 돈을 착복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가까운 분들조차 그런 오해를 할 정도였으니 모르는 분들은  친환경농사를 짓는 날 어떻게 봤겠나.

 

친환경농업 발전 공로로 청주시민대상 받아

 

2018년 청주시가 선정하는 시민대상을 받았다. 농업분야가 아닌 산업경제 부문에서 선정됐다는게 상당히 이례적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 농업분야를 별도로 선정해서 상을 주는 곳도 있다고 하던데, 청주시가 선정하는 시민대상에 별도의 농업분야는 없다. 청주시의 경우 오창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기업도 많고 상업도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는 도시인데, 평생 농사만 지어온 내가 산업경제 분야에서 상을 받게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구체적인 시민대상 수상 이유를 소개해 줄 수 있는지.

-내 입으로 수상이유를 말하려니 쑥스럽다. 아무래도 청주에서 처음 친환경농사를 시작하고, 청주시를 친환경농업의 중심도시로 만드는데 일조한 것에 대해 과분한 평가를 해준 것 같다. 특히, 2004년부터 오창 유기농작목회 회장을 맡아 전국 최초로 생산자가 주축이된 유기농산물 축제를 개최했었다. 4년 동안 작목회 주최로 유기농축제를 계속 운영하다 이후에는 청원군에서 이어받아 지금까지 청원생명축제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이외에도 청원생명쌀 브랜드 인지도 확산과 시군 통합과정에서 농민단체 대표로 활동했던 것들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좋게 평가해준 것 같다. 

 

소비자가 원하는 농사짓는 자세 전환 필요해

 

최근에는 학교 급식 사업에도 열심히라고 들었는데,

-현재 약 2만평 정도 농사를 짓고 있는데, 그 중 절반 정도를 학교 급식 수요에 맞춰 친환경농법으로 짓고 있다. 2012년부터 매년 70여명의 도시소비자를 초청해서 농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농촌과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높이는 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농민직거래 장터와 로컬푸드 학교 급식 사업도 이때부터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청주시와 충북도에 친환경급식 조례가 제정될 만큼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농사는 농민이 짓고 싶은 작목을 키우는게 아니라 소비자가 원하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작목 선택 뿐 아니라 포장 방법 역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발빠르게 파악해 맞춤 농사를 지어야한다. 무조건 수확량만 높이는 방식만 고집하면 농사로 먹고 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질거다.


존경받는 지도자회가 되도록 앞장서서 노력할 것

 

지난해부터 농촌지도자 충북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농촌지도자회 임원으로써 앞으로 추진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앞서 얘기했듯이, 난 마을이장과 농촌지도자회, 농업경영인회 활동을 같은 해에 시작한 특이한 경험을 갖고 있다. 특히 지도자회와 경영인회, 그리고 4-H 활동까지 한동안 같이 하다보니 농촌지도자회가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느낀게 많다.

우리 농업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렵다. 처음 수입개방의 파고가 밀려올 땐, 그래도 농민이 힘을 합치면 괜찮아지겠지 했지만, 솔직히 나아진게 별로 없다. 문제는 앞으로도 농촌 현실이 나아질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농촌지도자회원 상당수가 스스로 농업인단체 중에 맏형이라는 얘길 많이한다.

앞으로는 우리 회원들의 입이아니라 다른 농민 단체회원들의 입에서 역시 지도자회가 맏형답다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하고 싶다.  앞으로 농촌지도자회가 수많은 농민단체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농업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실질적인 맏형 노룻을 할 수 있도록 나부터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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