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과 함께, 꽃 따라 삼천리 꿀 따러 사십년

대전농촌지도자 양봉연구회 산증인…양봉업 선도
현 서일환 대전시회장 체제서 축산·양봉 분리·신설

 

집 떠나 풍찬노숙 다반사…나이드니 부부애 애틋해져
아들들에게도 미안, 다가가니 이제는 친구 같은 존재
교통사고 이후 택시 밥벌이, 식구들 권유로 다시 양봉

 

 

대청호는 넓고 큼지막했다. 가뭄인가 싶은데 호수는 무심한 듯 넉넉했다. 호숫가 굽이굽이, 길 따라 구불구불 꽃은 피고지고 있었다. 윙윙 벌들이 꽃을 좇는 소리가 나무들을 감쌌다.


농촌지도자 대전광역시연합회 양봉연구회 조성환 씨 농장을 찾아가는 길, 산골마을은 농사체험 온 도시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봄처럼 울긋불긋했다. 뜻하지 않은 야단법석이다.


수령 200년이 넘은 느티나무들이 마을 어귀마다 보호수 푯말과 동무하는 마을을 지나치자 비포장 길이 시작됐다. 초록의 향기가 그윽하고도 깊은 산골,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조성환 씨는 벌통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딴 농사는 몰라유, 벌만 쳤으니

 

신탄진에 집이 있고 다른 농사는 해본 적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농촌에서 웬만하면 해봤음직한 벼농사도, 고추농사도 해보지 않았다. 아예 모른단다. 평생 벌치는 일만 했으니 그럴만하다.


정착민과 유목민의 차이라고나 할까. 주력 농사가 따로 있고 소일거리로 벌을 치는 이들이야 한 곳에 붙박이기 일쑤다. 반면 양봉이 주업인 이들은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만 한다. 풀과 물을 찾아 유목생활을 하듯 벌들과 함께 꽃을 따라다녀야 할 운명이다.


벌통이 나란히 줄지어 섰고 벌들은 연신 집을 들락날락 해대고 있었다. 달콤한 꽃을 찾아 떠나는 녀석, 먼 곳에서 꽃가루를 물고와 입구에 떨구고 집으로 들어가는 놈, 집안에서 붕붕 날갯짓으로 일하는 녀석 등등. 참 어지간히 바쁜가 보다. 일벌들의 일생이 그렇다.


조원희(64세) 씨는 약관에 벌을 배웠다. 방황의 십대를 객지에서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니 선친께서 벌통 다섯 개를 들여 벌을 치고 계셨다. 대개 벌 쏘이는 것을 무서워들 하는데 조 씨는 처음부터 무섭다거나 싫지가 않았다. 되레 흥미를 느꼈다.


아버지에게 배우고, 책이나 다른 양봉가를 찾아다니며 독학했다. 여느 친구들과 달리 학교생활을 길게 하지 못했지만 양봉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이른바 뭔가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양봉을 파고들었다. 대학교수들도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시시했다.


양봉 전문가가 되려면 알아야 할 것이 꽤 많았다. 벌을 알아야 했고 꽃을 배워야 했다. 벌의 습성을 이론적으로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는 더 어려운 법이다. 세상의 꽃이란 꽃은 대부분 알아야 했다. 꿀을 딸 수 있는지, 언제 피고 언제 지는지 등등. 지리와 기후도 통달해야 했다. 언제 어디로 가야 어떤 꽃이 있고 꿀을 딸 수 있는지.

 

일 년 중 절반 이상을 한뎃잠


전매청에 근무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신탄진으로 이사했던 그는 팔 남매 중 장남이었다. 손이 귀한 집안인 탓에 장남, 장손인 그는 조부모 품에서 자랐다. 부모님 사랑은 멀었고 할아버지의 편애는 지나쳤다.


“어머니아버지 손에 자란 기억이 없어요, 할아버지할머니 품에서 컸죠. 할아버지가 5대 독자이셔서 그런지 저를 끔찍이 위하셨죠. 엄하게 해야 할 때 엄하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저는 남 위할 줄 모르고, 버릇없이 크고, 말썽 피우기 일쑤였지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뭐든지 성에 차지 않으면 울뚝 엎어버리고야 마는 불뚝성이었다. 그는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귀향, 십대의 방황을 갈무리하게 한 것도 벌이었다. 어찌 보면 운명적으로 벌과 만난 것이다.


“양봉에 재미를 붙이고는 정말 한 우물 파듯 양봉에만 매달렸지요. 어려서 못한 공부 그때 원 없이 했어요. 배울 게 얼마나 많던지. 기록하는 습관도 공부할 때 생기더군요. 꽃 피는 시기, 이동경로, 꿀 나는 상태 등 일일이 기록일지를 쓰다 보니 지금도 그렇고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십대 중반, 1979년 말에 결혼했다. 신혼기간은 짧았다. 입춘이 지나 경칩 무렵이면 벌통을 차에 실어 ‘꽃길’에 들어서야 했기 때문이다. 따뜻한 남쪽에서 꽃길을 시작했다. 제주 유채꽃부터 아카시아 꽃이 피기까지 한번 길을 나서면 몇 달이고 한뎃잠을 자야 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유채꽃이 그리 많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섬 곳곳이 유채였어요. 날씨도 사뭇 따뜻하고. 그래서 이 지역 양봉가들은 설 쇠고는 채비해서 제주로 갔습니다. 2월이면 가서 벌을 깨우고, 3월부터 유채 꿀을 뜨기 시작해 4월 초, 중순까지 있다 나왔죠.”


결혼했다고 꿀 따러, 꽃 따라 집을 나서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새 신부를 홀로 두고 벌통을 울타리 삼아 한뎃잠을 자야했으니 새 신랑도 서글펐을 터, 그러나 독수공방 각시만 했겠는가. 아카시아 꽃이 얼른 피기를, 어서 벌통 챙겨서 집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참 미안한 맘뿐이었죠. 1990년대 초반까지 거의 해마다 제주도에서 시작해, 육지에 와서도 남쪽에서부터 꽃 따라 올라오다 보면, 대전지역에 아카시아 꽃이 피는 오뉴월에나 잠시 집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집사람을 보면 서먹서먹하기까지 했을 정도였죠.”

 

불의의 교통사고, 택시기사의 삶


약관에 입문한 양봉업은 1995년, 불혹의 나이에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접어야 할 때까지 스무 해를 매진했다. 비록 큰 벌이는 아닐지라도 양봉업은 그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자 직업이었다. 성인 시점부터 보면 양봉은 그의 인생이자 일생인 셈이었다.


대개 양력 2월이면 설을 쇤 직후 제주로 향했다. 유채가 많은 제주 표선이나 한림 등지에서 자리를 틀고 벌을 깨운다. 어떤 이들은 섬 속의 섬, 우도까지 들어갔다. 잠에서 깬 벌들이 3월이면 노란 유채꽃밭을 오가며 바삐 일하고, 절정을 지나 4월 중순이면 섬에서 나올 채비를 했다.


아무리 늦어도 4월 하순에는 섬을 ‘탈출’해야 했다. 기온이 높아 자칫 잘못하면 벌들을 “삶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92년경 제주와 완도를 오가는 배에 짐차 째 실을 수 있기 전까지는 벌통을 일일이 싣고 하역해야 했다. 육지에 내리자마자 꽃을 찾아 이동하는 일도 긴급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벌이 활동하지 않는 깜깜한 밤에만 이동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적잖은 양봉가들이 계곡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충돌사고로 고통을 겪기도 하죠. 양봉은 화물차보험이든 재해보험이든 취약분야입니다. 이래저래 양봉산업 육성법부터 필요한 법제가 많습니다.”


완도, 해남, 여수, 남해, 통영 등 남쪽에서 4월 중·하순이면 아카시아 꽃을 보며 북상한다. 5월 중순경 신탄진 집에 머물며 아카시아 꿀을 따는 것도 잠시, 꽃 따라 경기지역까지 갔다가 밤꽃이 피는 6월에 다시 집 근처로 온다. 7월 중순이 지나 싸리를 보려 경기북부, 강원도까지 갔다가 8월말, 9월초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시월에 한 보름정도 벌들에게 월동식량을 먹이고 겨울잠에 들어서야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할 수 있었다.


“요즘은 기온이 상승하면서 전반적으로 사이클이 앞당겨졌어요. 11월말, 12월이면 완도든 영암이든 따뜻한 남쪽지방에서 벌을 깨우고 일을 시작합니다. 저는 힘에 부치기도 하고 욕심 부리기도 싫고 해서 이동기간을 대폭 줄였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당시 중상을 입고 1년 가까이 병원신세를 졌다. 꿀이 가득한 무거운 벌통을 들 수 없고 건강도 허락하지 않아 한 7년여 택시기사로 살았다. 그러다 쌍둥이 두 아들이 각각 통장을 내밀며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 다시 하시라고, 거들겠다고 해 그는 양봉가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오른팔의 통증은 어쩔 수 없다.

 

벌 같은 일생, 이제는 여유롭게


“병원에 11개월 있으면서 아이들과 친해졌습니다. 사실 제가 어려서 사랑만 받고 버릇없이 큰 탓에 반면교사 식으로 아이들에게 무척 엄했었던 거죠. 제가 집 떠나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더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후회했습니다. 엄한 것과 기를 죽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죠.”


한 해 절반 이상을 식구와 떨어져 지내다 병원에 입원해서야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단다. 각시에게도 더 애틋한 감정이 생기고, 두 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때부터 많은 것을 내려놨다고 한다. 당구 700의 실력으로 아이들에게 당구를 가르치고 함께 어울렸다. 컴퓨터 게임도 나란히 앉아 즐겼다.


“집 떠나 홀로 산 세월이 길었죠. 나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라 집사람도,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에 미안한 맘이 큽니다. 이제는 더 애틋해졌죠.”


그는 도시양봉 교육을 4년째 하고 있다. 대전시와 구청의 지원으로 매년 다섯 명씩 양봉가를 키우고 있다. 양봉가도, 교육생도 대부분 나이가 적잖다. 50대도 드물단다. 하물며 젊은이는 더더욱 보기 힘들다.


한국양봉협회 대전시지부 활동은 십 수년째 하고 있다. 농촌지도자로 작년까지는 축산연구회에 있다가 올해부터 양봉연구회로 분리해 활동하고 있다. 농촌지도자대전시연합회의 경우 지역조직뿐 아니라 품목별 조직도 갖추고 있다. 현 서일환 대전시연합회장 체제에서 양봉과 축산이 분리된 것이다.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인생이 성공적인 삶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복하고 좋습니다. 가진 것 별로 없어도 베풀면서 여유롭게 살 겁니다. 벌과 함께요.”

백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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