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선친 뜻 따라 서울살이 접고 귀향, 낙농외길 35년

축사 증축 거듭…5천㎡ 넘는 규모, 원유 하루 3톤

아이엠에프 때 해태유업 부도로 곤경, 협상대표 참여도

상중에도 젖 짜야했던 설움…이젠 인생도 금슬도 황금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돈키호테로 잘 알려진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말이라고 한다. 로마가 처음부터 제국이 아니었으며 대제국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뜻이다.


김윤중 한국농촌지도자화성시연합회장(경기도연합회 사업부회장)의 낙농업 규모에도 알맞추 붙일만한 말이다. 축사는 5천 제곱미터가 넘고 이른바 원유 쿼터, 일일 납유 배정물량이 3톤에 이른다. 이도 지난해 3.5톤에서 0.5톤 줄인 쿼터다. 젖소 사육규모, 동시착유시설 등을 점차 늘리다보니 축사를 짓고 허물고 짓고를 반복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선친의 ‘빅 피처’, 맏이의 숙명


김윤중 회장(61세)은 지금 살고 있는 화성시 우정읍 호곡에서 2남4녀 중 넷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이 셋이고 아래로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사는 곳에서 너른 들판을 조금만 가로지르면 화옹호와 서해갯벌이 지척이다. 그래서인지 생명의 바다에 관해서도 해박하다.


천석지기 집안이었다. 논 수백 마지기에 머슴 두서넛을 뒀다. 선친께서는 명리에 밝으셨으나 몸을 쓰는 일에는 남보다 못했다. 산업화 진전으로 머슴들이 떠나고 집안에 일꾼이 사라지자 선친 혼자서는 농사 건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두레와 품앗이로, 때론 일꾼을 사서 써가며 논농사를 꾸렸다.


자식들 교육도 남달랐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일찌감치 도시로, 대처로 보내 선진 문물과 교육을 접하게 했다. 맏아들도 누이들이 있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취직해 직장생활을 하려던 젊은이는 꿈을 펼치지 못했다. 동창 친구들도 서울살이를 충동였지만 본인 뜻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맏아들의 숙명이었든 선친의 ‘큰 그림’이었든 그는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취직을 했죠.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그만두라고 하시고 누나, 매형들에게 부탁해 다시 취직하려고 하면 취직시키지 말라고, 내려 보내라 하시고.” 형제들이 다 서울에 살았으니 농사 건사할 일손이 필요했던 선친은 맏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열혈청년은 결국 1983년 ‘낙향’했다. 선친은 이미 그해 겨울 맏아들이 돌아올 것을 알고 농어민후계자 신청을 해뒀다. 이듬해 곧바로 복합영농 후계자로 선정돼 자금지원을 받았다. 맏아들의 혼인도 손수 추진하셨다. 낙향해서도 한동안 도시생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서울을 오가며 구직활동을 하는 아들이 농촌에 정착하도록 하려는 가리사니였다.


어느 날 빼어난 미모에 건강해 뵈는 아가씨가 눈에 띄자 맏며느리로 점찍고 안성으로 매파를 보냈다. “동네 언니가 이 마을로 시집을 왔는데, 언니 친동생이 제 친구였죠. 그 친구하고 이곳에 들러리 왔다가 아버님 눈에 띈 거예요. 튼튼하고 일 잘하게 생겼는지.” 부인 맹경애 씨(57세)가 35년 전 일을 회상하며 웃었다. 친정엄마는 당시 이 집 짚가리가 엄청나게 큰 것을 보시고 딸의 출가를 승낙하셨단다.

 

송아지 세 마리로 낙농업 시작


선친은 맏아들의 농촌 정착에 적극적이셨다. 귀향과 정착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84년 봄에 서둘러 약혼하고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농어민후계자에 선정돼 바로 영농에 뛰어들었다. 당시 150마지기가 넘는 논을 비롯해 적잖은 농경지로 농기계 없이는 농사가 어려웠다.


“이앙기를 처음 들여와 기계모를 냈을 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게 기억납니다. 손모는 퍼렇고 기계모는 하얗잖아요, 모를 냈는지 안 냈는지 모를 정도로.” 어느덧 도시생활을 포기하고 농촌정착을 결심한 김 씨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들 틈도 없이 바삐 일했다. 적잖은 농사규모임에도 생경한 낙농업에 도전했다.


후계자자금으로 송아지 세 마리를 들였다. 당시 송아지 한 마리에 150만원에 달했다. 쌀 80킬로그램짜리 30가마 값에 견줄 정도니 상대적 화폐가치로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동네에 목장집이 있었고, 앞으로 벌이가 괜찮을 것이라는 권유에 과감히 입문한 것이다. 도입소 세 마리를 더해 1984년 말부터 젖을 짜기 시작했다. 당시 여섯 마리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지금 소는 순한데 그 당시 소는 착유하기 힘들 정도로 거칠었어요. 묶어놓고 젖을 짜고, 착유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죠. 그때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어요. 신혼인데 나가면 함흥차사인 거예요. 후계자모임 총무도 맡고 낙농인도 만나고, 술자리가 많았죠.” 맹 씨는 시집오자마자 사납고 드센 소들을 상대해야 했다. 발굽에 밟혀 발가락 하나가 으스러진 것도 ‘목부’ 2, 3년차에 일어난 일이다.


시부모님과 운신 못하시는 시할머니 모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버님은 원체 호인이셨고, 어머님도 며느리 입장을 잘 헤아려주셨다. 단지 소젖 짜는 일을 포함해 농사일과 집안일이 너무 많아 몸이 고되고 힘들었다. 듬직한 신랑이 옆에 있으면 좋으련만 바깥일에 바빠 귀가가 늦기 일쑤였다. 그래도 김 씨는 새벽 젖 짜기를 거른 적이 없다. 암만 술을 마셨어도 아침 젖은 꼭 짰다.


해태유업의 부도사태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인근지역 700여 농가가 해태에 납유했는데 부도로 대금정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협상대표로 참여했다. 농가들이 일부 대금을 받기는 했으나 체불규모가 커 피해가 적잖았다. 선친께서 벼 팔아 사룟값 대주시고, 예물로 간직하던 금붙이와 다이아몬드반지 등을 팔아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은 조립식, 축사는 제대로


여섯 마리에서 여덟, 열, 열다섯, 스무 마리까지 늘어나면서 축사에 매인 몸이 됐다. 부부가 오붓하게 여행 한 번 제대로 간 적 없고, 언감생심 아이들과의 가족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조문객을 맞이하다가도 때 되면 젖을 짜고 다시 상중으로 돌아가야 할 정도였다.


‘경포대 사건’은 잊히지 않는다. 낙농조합원들이 부부동반으로 버스 3대 대절해 강릉에 갔는데 집에 가야할 사람 파악해보니 유일하게 손을 들었단다. 다른 이들은 일꾼을 대체해놓고 왔던 것. 한밤중에 부랴부랴 돌아왔으니 섭섭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이야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농업대학을 나온 아들이 일을 하면서 부부의 시간이 여유로우니 격세지감이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집인데 지금은 아들내외가 살고 있어요. 200년 넘은 집에 소들 뛰어놀 마당까지 터가 꽤 넓었죠. 규모가 늘면서 더는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웃들에게 폐 끼치기 싫고 미안한 마음에 축사를 마을 외곽인 이곳으로 옮겼다. 25년 전이다. 축사를 제대로 짓고 살림집은 조립식으로 뚝딱 지었다. 한 3년간은 이곳과 본가를 오갔다. “사람은 간이 조립식 집에 살고 소들은 호텔에 사는 꼴이라고 남들이 그러대요.”


김 회장의 철칙 중 하나가 ‘암송아지는 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초유 만삭의 소를 들여오게 되면 대개 적응을 잘 못하고, 새끼 낳다가 실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내가 키우면 실패확률도 적고 적응도 잘한다는 것이 김 회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제는 철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한 해 송아지가 100두 내외 태어나는데 다 감당하기 어려워 남에게 줘야하는 형편이다.


연세우유 납품농가 중에서 유기농우유에 가장 적합한 농가로 지목돼 재작년까지 11년을 했다. 유기농사료에 1마리당 유기농인증 초지 400평 이상 등의 조건을 갖춘 농가는 드물었다. 유기농우유 착유소만 해도 80두, 물량은 2톤이 넘었다. 유기농초지도 4만평에 이른다. 유대도 일반 것이 1천원이면 유기농은 1천600원 정도를 받았다. 그러나 “앞에서 남고 뒤로 밑지는” 것이 유기농우유였다. 소가 아파도 주사를 놓지 못하고, 산유량도 20퍼센트 정도 적고, 사료와 축사시설 관리까지 번거로운 일이 많은 데다 악재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유기농우유를 접으면서 목장운영은 한결 편해졌다. 유기농 조사료는 그대로 하고 있다. 초지 4만평에 수단그라스, 호밀, 청보리 등을 이모작으로 재배해 일반 조사료의 두 배 가격으로 팔고 있다. 파종과 수확 등 대부분 기계화했고, 축사시설도 착유기 설비 등 적정시기 재투자를 통해 위생과 질병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이제는 봉사활동, 재능기부 보람


지금은 월급제 형태로 아들을 고용하고는 있으나 목장 대물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다. 현 세대까지만 농사를 짓고 자식 세대에서는 대부분 농업경영을 관둘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이니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도와 목장 일을 곧잘 하던 아들은 한국농업대학 낙농과를 졸업하고 열심히 일하며 ‘경영실습’을 겸하고 있다.


덕분에 김 회장 부부는 사회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을 찾고 있다. 김 회장은 그간에도 낙농육우협회 이사, 조암농협 이사 등을 십 수 년씩 했고 농촌지도자, 농업경영인 등 단체 활동도 적극 참여했다. 현재 농촌지도자화성시연합회장으로 도연합회 부회장직도 수행하고 있으며 화성시 농어업회의소 설립도 주도하고 있다. 사익을 위한 것 없이 오로지 봉사와 농업인 권익향상을 위해 애쓰고 있다.


부인 맹경애 씨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아들이 목장에 오지 못하게 해 일에서 손을 떼면서 처음에는 실직자가 된 기분이었는데 요즘은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주변에서 ‘언니’처럼 사는 게 로망이라고 할 정도예요.” 목부를 그만두고 소녀 적 꿈이었던 음악에 취미를 붙였다. 클래식기타를 배우고 익혀 이제는 공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재능기부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김 회장도 마찬가지다. 부부는 젊어서 못했던 여행을 원 없이 다니고 봉사활동과 취미생활도 즐기고 있다. 정년이 없는 만년 직장이라며 서울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우리 인생을 보니 고진감래를 실감한다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