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기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공학부장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농업에 이용되는 기계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어른 둘이 발로 밟아 탈곡통을 돌리면서 벼 이삭을 떨어내는 족답식 탈곡기가 기계라면 기계였다.

그 뒤 경운기 머리에 벨트를 걸어 탈곡통을 돌리는 게 나왔고, 한참 뒤에 전기 모터로 탈곡통을 돌리는 전동식 탈곡기가 나왔다. 이러한 탈곡기에는 늘 타원형의 작은 알루미늄 판이 붙어 있었다.

‘농자재검사필증’이다. 아무나 농기계를 만들어 팔면 안전에 문제가 될 수 있기에 국가기관에서 일정 검사를 하고, 그 검사를 통과한 농기계에는 검사했다는 증명서를 알루미늄 판에 인쇄해서 붙여둔 것이다. 그런 증명서를 발급해주던 기관이 농자재검사소이다.


쌀 자급을 이뤘던 통일벼가 나오기 전인 60년대에는 농가 인구가 전체 인구의 44%나 되었고, 국민소득은 1인당 300달러에 불과했다.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업기계화가 절실한 시기였다. 그런 이유로 나라에서 경운기를 보급하기 시작한 게 이 무렵이다. 경운기뿐만 아니라 모내기를 해주는 이앙기도 필요했고, 농약 치는 동력분무기도 필요했다. 정부에서는 수원에 터를 잡고 있던 농촌진흥청 내에 농업기계화연구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농업기계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2013년, 공공기관 지방이전사업에 따라 농촌진흥청이 전주·완주에 있는 혁신도시로 이전했다. 당연히 농진청 소속기관인 농업공학부도 전주에 터를 잡았다. 왜 전주였을까.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그 답은 예상외로 가까이 있었다.


농진청 국립농업과학원 농업공학부는 황방산 아래에 자리한다. 황방산은 전주 외곽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후백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한 뒤 외침을 막고자 산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고 한다. 황방산 정상에서 내려와 농업공학부 쪽으로 가다보면 되바위 고개가 있고, 그 언덕에 있는 큰 바위 한가운데에 마치 됫박 모양의 홈이 파져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군역조세를 부담하던 백성들이 해마다 되 크기가 달라져 살기가 어려워지자 그 해결책으로 바위 중앙에 되를 파 놓고 크기 차이로 분쟁이 있을 경우 표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자연과학을 이용해 농기계를 개발할 때는 늘 길이나 무게와 같은 단위가 필요하다. 요즘이야 국제단위가 통일되어 있다지만, 예전에도 그런 표준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 특히 백성들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그런 표준을 만들어 두었다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 바로 그런 곳에 단위의 표준을 달고 사는 농업공학부가 오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황방산에서 혁신도시를 내려다보면 기지제라는 자그마한 저수지가 보인다. 한자로는 ‘기계 기(機)’와 ‘따 지(地)’를 쓴다. 저수지 이름에 기계라는 글자가 들어간 게 생뚱맞다. 그러나 한자로 풀기 전에 썼던 우리말 이름을 보면 그 궁금증이 금방 풀린다. 본래는 ‘틀못’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기지제로 바꿨다고 한다. 황방산에서 내려다본 저수지 모양이 마치 베틀과 닮아서 틀못이라고 했는데, 한자로 바꾸면서 기지제가 된 것이다. 농촌진흥청에 있는 기관 중 유일하게 기계를 연구를 하는 농업공학부가 기지제 지척에 자리를 잡은 것 또한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운명에 따라 전주에 오게 된 국립농업과학원 농업공학부. 오늘도 농업 생산 작업의 자동화와 로봇화 기술, 농가경영 안정을 위한 에너지 절감 기술, 농산물 부가가치 향상을 위한 수확후 관리 기술, 농업재해 예방관리 기술 개발 업무를 수행하며 농업을 매력적인 산업으로 만들고 소비자들에게는 보다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최근 들어서는 정보통신 기술을 농업에 접목하는 스마트농업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표준과 기계장치에 익숙한 연구원들이 모여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을 활용해 농사짓도록 연구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첨병. 농업공학부의 연구원들과 함께 한국 농업을 이끌 멋진 기술을 개발할 것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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