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보담도 여럿이 다 잘돼야 좋은 일이죠”

증평군의 자랑거리 ‘부추’ 선구자, 농가 조직화 앞장

짧은 객지생활 접고 귀향…총각 때부터 양돈 이끌어


부추 다듬을 땐 마을어른들 모여 정담 나누던 ‘사랑방’

공동체의식 사라지는 현실…잔치라도 자주 열어 ‘보답’

안성호·지용숙 부부

 

부추는 지역에 따라 솔, 정구지라고도 부른다. 중국 서부, 북부를 원산지로 보는데 한반도엔 삼국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16세기 명대에 편찬한 『본초강목』에, 구채(부추)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신장이나 고환, 부신 등 비뇨 생식기 계통을 다스린다는 기록이 있다. 『동의보감』도 부추는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위속 열기를 없애며, 허약한 것을 보하고, 양기를 세게 하며, 허리와 무릎을 덥게 한다고 소개했다.


부추가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맵고 약간 신맛 나는 건 한가지일 텐데 인기가 높고 값도 더 받는다니 그 까닭이 뭘까? 증평에서 부추로 억대부농 대열에 올랐다는 안성호 전 한국농촌지도자증평군연합회장을 찾아가며 든 궁금증이었다. 게다가 증평군의 부추 재배는 경기도 양평 등에 견주면 ‘후발주자’다. 군수까지 나서서 ‘증평부추’를 자랑삼고 농가들을 본보기로 추켜세우는 형국이니 ‘부추증평’이라고 부르면 과장일까.

 

자상한 부모님과 정든 고향을 못 잊어


안성호 회장(66세)이 사는 증평읍 벌말에 다다르자 37사단 표지판이 눈에 띈다. 마을이 군부대 아래 있으니 ‘사하촌’에 빗대 ‘군하촌’이랄까, 기지촌은 주로 미군부대에 쓰니 굳이 작명놀이를 하자면 그렇다. 군부대 앞 양지바른 곳에서 안 회장과 부인 지용숙 씨(61세)가 반겼다.


군부대가 있어 불편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안 회장은 일장일단이 있다고 답했다. 예전에는 군부대 덕에 마을이 활기차고 여러모로 도움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계륵 취급 받는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전체면적이나 자치단체 규모로 보면 증평은 꽤 작은 곳인 만큼 군부대 비중이 작지 않다는 것, 그래서 개발이 더딜 수밖에 없으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주민들이 늘었다는 설명이다.


부추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젊은 시절을 추억해보자고 했더니 안 회장 부부의 말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안 씨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서울 대림동에서 중견 기업에 다니다 안양으로 옮겼다. “당시 안양시가 아니고 읍이었는데 ‘서부서울’이라는 간판이 있던 시절이었죠.” 그곳엔 증평 출신 아가씨들도 꽤 많았다고. 얼마 후 <대농>이 청주에 설립됐는데 안양에서 직원교육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청년 안성호는 객지생활을 오래하지 않았다. 적응하지 못했단다. 사실은 외롭고 고단할 때마다 정든 고향과 친구들, 자상하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3남1녀 중 맏이인 그는 어려서부터 조부모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부모님 생각도 나고, 시골에서는 맘먹은 대로 할 수 있으니까 ‘돌아가자’ 결심했던 거죠.”


부창부수. 부인 지용숙 씨도 비슷했다. 인천에서 회사에 다니던 지 씨는 시골생활을 선호했다. 너도나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던 세태인데 그는 고향 충주가 좋았다. “도시에서 셋방 사는 사람들을 보니 고향이 더 그립더라고요. 아이들 뛰어놀 마당도 없고, 이웃들 눈치 보며 사느니 시골에서 헌집이라도 내 집에서 맘 편히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지 씨는 시집와서 보니 시부모님이 그렇게 자상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안성호 회장은 지난해 제30회 충청북도농촌지도자대회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농촌지도자 대상 선정 당시 부추 밭에서 찍은 사진 앞에 다시 선 안성호·지용숙 부부

 

 

돈 모으기보다 쓰는 것부터 배운 젊은이


지금은 덩치가 크지만 젊어서는 호리호리했다. 몸무게가 65킬로그램 정도였으니 가뿐했다. 당시 태권도 공인 3단인 그는 군대표로 서울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무엇이든 도전하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건장한 이십대 초반의 청년은 부농의 꿈을 이루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귀향했다. 입대 전에 어느 정도 자리매김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부모가 물려준 3천여 평의 땅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벼농사와 고추, 파 등 밭농사를 병행했는데 벌이가 시원찮았다. 지금이야 내병성 고추 품종이 있지만 그때는 탄저병이 오면 절단나기 십상이었다. 그의 선택은 돼지였다.


“여기 37사단 군부대가 있어서 그런지 일찍이 양돈이 발달하고 선도하던 곳입니다. 충북 양돈 시세를 증평에서 좌지우지할 정도였죠. 당시만 해도 돼지 먹일 게 변변찮았는데, 장병들이 먹고 남긴 짬밥이라고 하나, 구정물을 받아다 돼지를 키운 거죠. 돈이 되는 걸 보니 사리분별 밝은 청년들이 양돈에 뛰어들었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입대가 연기됐다. 신체검사에서 ‘1갑’이 나와 논산훈련소에 갔으나 결핵으로 퇴소했다. 마을에서 같이 어울리던 친구 중에 결핵 걸린 녀석이 있었는데 전염된 것이었다. 일 끝내고 사랑방이나 주막에 모여 청년들과 술잔 기울이며 자신과 마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낙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중에 결핵은 완치됐으나 혈압문제로 결국 늦깎이 보충역으로 전역했다. 그새 양돈규모는 컸다.


“돈 모으는 것보다 돈 쓰는 걸 먼저 배운 셈이죠. 1970년대 불황을 겪기도 했지만 양돈하면서 돈을 꽤 만졌는데, 총각시절이라 그런지 모으지 못하고 여기저기 쓰고 다니기 바빴어요.”


다름 아닌 양돈협회 활동이나 청년회 일이었다. 협회 지부장을 맡고 청년회장을 맡으면서 씀씀이가 컸다. 당시 드물다던 자동차를 끌고 다녔다. 청년들을 조직하는 일뿐 아니라 마을 어른들을 위한 잔치나 행사, 마을 가꾸기 등 내일남일 닥치는 대로 부지런했다. 나이 서른셋 늦은 결혼 후에도 그의 지역사회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리사니 없이 막무가내는 아니었죠. 마을 노래자랑에 폼 나는 경품들을 준비해 어른들을 기쁘게 한 일, 양돈과 함께 복합영농을 통해 마을에 그런대로 잘사는 집들이 늘어나던 일, 흥청망청이 아니라 그렇게 남을 위해 썼으니 지금 생각해도 흐뭇한 일이 많네요.”

 

양돈 관두고 부추, 증평 대표 소득작물로


농촌지도자회 활동은 일찌감치 시작했다. 1980년대 30대에 농촌지도자회에 가입했으니 2003년 증평읍이 괴산군에서 분리, 독립해 행정 군으로 되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괴산군연합회 활동을 벌였다. 증평군은 면적으로는 괴산군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초미니’ 지자체이나 인구수로는 엇비슷하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정관상 시·군 연합회 정식등록이 가능한 회원 수로 보면 증평군은 한참 미달이었다. 1993년부터 농촌지도자회 증평읍 회장을 맡아온 그는 증평군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회원배가운동을 벌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어엿한 대의원 자격을 얻었다. 안 씨는 농촌지도자증평군연합회 3, 4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 사이 양돈을 접었다. 냄새 때문에 이웃주민들이 싫어하는 데다 구제역이 한판 휩쓸고 간 뒤끝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분뇨처리시설을 제대로 갖춰 다시 시작하리라 계획했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일구며 때를 기다렸지만 쉽지 않았다. 대신 농업기술센터 교육을 찾아다니며 새 길을 모색했다. 부추와의 인연은 그렇게 맺었다.“인근에 귀농해 작은 규모로 부추농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요, 당시 생활개선회장과 제가 센터에서 교육 받고, 시범사업을 신청해 부추농사를 시작하게 된 거죠. 어찌 보면 불모지나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시작해 열일곱 농가가 조직됐고, 올해는 스무 집을 넘길 것으로 봐요.”


증평 부추는 대전 노은도매시장으로 직행한다. 처음에는 서울 가락동이나 청주 도매시장에도 내봤으나 근래에는 전량 노은시장에 출하한다. 노은시장 중앙청과는 안정적인 판로인 데다 값도 잘 쳐주기 때문이다. ‘증평부추연구회’ 17농가의 부추는 “깨끗하다”는 평가 덕분인지 중간상인과 소비자 모두 선호한다.


증평부추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사람을 고용해 대규모 농사를 하는 곳도 있는데, 우리는 대부분 가족이 할 수 있을 정도 규모예요. 청주 사는 여동생이나 시내 사는 아들들이 일손을 보태죠.” 안 회장은 봄부터 11월말까지 1년 여덟 번의 부추 수확을 통해 농가들의 소득은 만족할 수준이라고 귀띔했다.


“요즘은 제피기를 써요. 껍질 벗기는 작업이 만만찮은데 기계가 대신하는 겁니다. 덕분에 일손도 줄이고 말끔하게 다듬어지니 상품성도 좋아지니 일석이조죠.” 다만 아쉬운 것은 ‘사랑방’이 사라졌다는 것. 부추 다듬을 때면 동네 어른들이 경로당에 가지 않고 안 회장 집으로 와서 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눴는데 공동체문화가 사라지니 애석한 일이다. “용채도 드리고 속옷 등 옷가지라도 챙겨드렸는데 그러질 못하네요.”


그래도 안 회장은 가끔 몇몇이 뜻을 모아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 오죽하면 옆 동네에서 마을잔치 방송 좀 하지 말라고, 자기네는 드문 일인데 안 회장 동네는 자주 하는 것 같아 애먹는다고 하소연을 할까. 그는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농사 건사는 물론 마을일이든 단체 활동이든 피하거나 모르쇠하지 않는 성격이다. 힘닿는 때까지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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