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이 세상인류 생명창고의 주인”

‘농민독본’ 집필…농촌계몽사상 전파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혹독한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굳은 신념을 갖고 독립운동을 펼친 수많은 의사(義士)와 열사(烈士)들을 한 번씩 떠올려보게 된다.


특히 윤봉길, 이승훈, 손병희, 이동휘, 최용신 등은 민족독립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동시에 펼친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 매헌 윤봉길은 19세의 나이로 농촌개혁 운동에 힘썼고, 중국으로 망명해 조국 독립을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 19세때 농촌계몽운동 눈 떠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 윤봉길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해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윤 의사가 농촌계몽운동에 눈을 뜬 것은 일명 ‘묘표사건’을 통해서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윤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청년은 아버지의 무덤을 찾기 위해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윤 의사는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해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 농민독본 3권 저술


윤봉길 의사의 농촌계몽 활동은 야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윤 의사는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해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 개혁을 실시했다. 주된 사업은 농가 부업 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 생활 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해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 수암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도모와 체력 향상 등 윤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2011년에 발견된 농민독본 한글판

 

■ “농사는 천하지 대본”


윤봉길 의사가 야학에서 농민과 청소년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데 사용한 농민독본 한글편의 일부는 지난 2011년 그의 사당인 예산 충의사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보물 제568호로 지정됐다.


농민독본은 ‘계몽편’과 ‘농민편’ 등 3편으로 구성됐다. 특히 윤봉길 의사는 농민독본 3권에서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라는 말은 결코 묵은지가 아니고, 억만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라고 말했다.

또 “농민은 세상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라고 말해 지금 우리 농업이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 중국 홍구공원에서 폭탄투척


1929년에 접어들자 농촌계몽운동, 농촌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이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이 결국 민족운동, 즉 독립운동으로 귀결돼야 하는 것 이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이후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 상해 총영사 무라이 등에게 폭탄투척을 감행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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