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사과 부러워 농사 결심…낙농 포기 곡절도




의왕시 농업경영인, 4H 회장 거쳐 농촌지도자회장 역임

어려서부터 “농사는 천직” 생각, 평생 고향 떠난 적 없어

집안 ‘버팀목’ 마을 ‘지킴이’ 보람…“진정한 지도자” 칭송

마을은 한산했다. 의왕시청 앞 4차로는 바삐 오가는 차들이 도시 분위기로 주행했다. 시청 옆 ‘안골’에 들어서자 다른 세상인 듯했다. 오봉산을 배경으로 김상석 농촌지도자 경기도연합회 수석부회장이 나타났다. 악수 후 그가 내민 명함에는 ‘의왕고천공공주택지구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다소 생소한 직함이 박혀 있었다.


김상석 부회장(62세)이 인터뷰 장소로 안내한 곳은 <안골식당>. 토종닭과 직접 재배한 채소 등속으로 건강한 밥상을 차렸더랬다. 오봉산 초입이라 단골도 많고 등산객들이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하던 식당이다. 지금은 문을 닫았다. ‘의왕고천행복타운’으로 지정돼 마을 전체가 수용된 탓이다. 빈집이 눈에 띄고 인적이 드문 까닭이었다.


김 부회장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아주머니 네댓 분이 마실을 왔다. 자연스레 옛일을 들춰보게 됐다. 마을 변천사와 김 부회장 인생사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다. 그는 군에 복무하던 20대 초반 시절을 제외하면 마을을 떠난 적이 없다. 태어나고 자란 곳, 평생 농사지으며 버팀목이요 지킴이가 된 그곳을 이제는 떠나야 한단다.

김상석 농촌지도자경기도연합회 수석부회장.

 

옆집 사과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는 4남2녀 여섯 형제 중 둘째,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골’은 행정구역 상 화성군 일왕면, 수원군 일왕면, 시흥군 의왕면을 거쳐 현재의 의왕시 고천동에 편재됐다. 생활권은 안양, 군포에 가깝다. 일찌감치 공업이 발달한 곳인 만큼 대개 농사보다는 일반직장 선호도가 높았다. 학생시절 당시 부친께서도 인근 <OB맥주>에 다니셨고, 아버지 형제분들이나 일가친척 대부분 회사에 나갔다.


“옆집 사과나무에 사과가 잔뜩 열렸는데, 그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어요.”


농사짓게 된 계기를 묻자 어린 시절 옆집 사과 얘기를 꺼냈다. 농사가 천직이라 여긴 청년 김상석의 선택은 대학 원예과 진학이었다. 어찌 보면 그의 뇌리에 박힌 ‘옆집 사과’가 육십 평생을 이끌어온 셈이다. 군 입대 전에 사과나무 네 품종 24그루를 심었는데 마을 어른들이 실컷 자셨다고 한다.


“하루는 조모님께서 밭에 심어놓은 배추가 마뜩찮으신지 내다 팔라고 하시더군요. 살펴보니 붕소 결핍으로 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거예요. 처방해서 씨알 좋은 배추가 나오니 흡족하신지 ‘망한 배추 상석이가 다 살렸다’고 자랑이 굉장하셨지요.”


그는 그렇게 마을에서 이른바 ‘전문가’로 통했다. 갖가지 채소와 과일 농사와 관련해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았다. 전문가이자 해결사였던 셈이다. 트랙터 같은 농기계도 가장 먼저 들여오다 보니 웬만한 일은 대개 그의 손을 거쳤다. 학생 시절에도 농사일을 쉬지 않았으니 그의 ‘일복’은 타고났다.


“돈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일을 참 많이 했어요. 제 농사도 그렇지만 일가 어른들 땅도 일궈주고, 이웃 배추든 과수든 병충이 생기면 불려가서 처방해주고, 집안 대소사든 마을 일이든 저이가 대부분 도맡아 했습니다.”


부인 이인숙 씨(58세)가 거들었다. 1983년 9월에 결혼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인 이 씨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지인 소개로 김 씨를 만났다. 농사짓는 것도 개의치 않았으나 혼인하고 한동안은 밤마다 눈물지었다. 힘들기도 했고, 식구들 건사할 만한 농사규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상하면서도 다부진 성격의 남편이기에 의지할 만했다.

 

후계자 선정, 낙농으로 전환


결혼한 1983년에 농어민후계자로 선정됐다. 군 제대직후 1981년부터 바로 농사를 시작했는데 바쁘기만 하고 ‘업’으로 삼기엔 소득이 불안정했다. 원예전공을 살려 오이, 참외, 수박, 포도 등 당시 고소득 작물에 손을 댔는데 일손이 딸려 도저히 지속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른들은 그를 ‘조무래기’ 취급했다. 조부모와 부모 모두 농사일을 그에게 맡기고 소득은 나눴다.


마땅한 소득원이 없던 그에게 낙농은 돌파구가 될 만했다. 영농후계자 자금으로 송아지 두 마리를 마련했다. 상대적으로 돈 가치가 컸던 당시 마리당 150만 원에 달했다. 한 달 보름 만에 ‘관리부주의’로 한 마리가 죽었다. 사후 가축위생연구소 부검결과 노끈을 먹고 장이 막혀 죽은 것으로 판명했다. 이태 후 어미 소를 더 들여와 젖을 짜기 시작했다. 혈통이 좋은지 초산에 40킬로그램까지 짜기도 했다. 당시 평균 25킬로그램이었던 것에 견주면 ‘기록’이었다.


서울우유협동조합에 납유하며 한참 재미있게 일을 했다. 벼농사, 포도농사 등 해오던 농사도 계속했다. 1992년 ‘전업농’에 선정돼 정책자금으로 사육규모를 대폭 늘렸고 낙농호황기 덕에 융자금 5천만 원은 단숨에 거둬들일 수 있었다. 1997년에는 현대화한 축사를 짓고 자동급이기 시설 등도 갖췄다. 아뿔싸, 융자금을 상환하지 않고 축산자금을 더해 축사를 지었는데 나중에 그대로 빚이 됐다.


장성한 아들들의 ‘진로변경’도 불가피하게 돼 미안했다. 낙농을 가업으로 계승하려던 아비의 뜻을 접어야만 했다. 본인도 한경대학교 농학과에 편입해 ‘주경야독’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낙농업을 작파해야 하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나마 삼십대 두 아들이 각각 축협과 서울우유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다.

1990년 덴마크 농업연수 중 낙농가를 견학하는 모습.

 

농촌지도자 활동, 섬김의 리더십


“날짜도 잊지 않아요. 2002년 10월 28일, 주사 놓는데 그 순한 녀석이 발로 오른쪽 허벅지를 걷어찼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벼 베기를 끝내고 콤바인에서 내려서 보니 탱탱 부었더군요. 동맥이 터진 겁니다. 피를 천 시시 흘리고 일곱 시간 수술했으니 죽다 살았다고 했죠.”


결국 두어 달 일을 하지 못하고 낙농을 접어야만 했다. 하루 800리터가 넘던 산유량은 그새 절반도 되지 않는 300리터대로 곤두박질했다. 5년 전 투자했던 1억여 원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못내 아쉽죠. 당시 낙농을 계속 했다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겁니다. 다만 한두 해만 더 했어도 빚 다 갚고, 규모도 늘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안타까웠죠. 상심이 컸지만 그만하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제 할 일을 찾아 최선을 다했습니다. 되돌아봐도 긍정적인 마인드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 소 대신 토종닭을 분양받아 키웠고, 식당을 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안골식당>을 시작했다. 사고 전 2001년에 ‘부업’을 생각하고 지은 300평의 연동 비닐하우스도 밥벌이가 됐다. 원예전문가답게 꽃꽂이 소재인 ‘무지엽란’을 키워 지역 작목반과 함께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등에 공급해왔다. 이주할 지역에서는 엽란과 함께 목 소재도 할 계획이다.


그의 ‘일복’은 사회활동에도 두드러진다. 영농4H 활동은 물론 1980년대 초반 농업경영인 선정과 함께 1989년 경기도 농업경영인연합회 결성까지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농촌지도자회 활동의 경우 시흥군 의왕면에서 의왕시로 행정구역이 분리될 때 초대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의왕시 4H 회장, 농업경영인연합회장에 이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농촌지도자의왕시연합회장을 역임했다.


“회고해보니, 우여곡절도 많고 보람찬 일도 많네요. 우리 농업이 어렵긴 한데 저는 힘들다고 여긴 적이 별로 없습니다. 큰 욕심을 부린 적도 없고 순리대로, 이웃과 함께, 나누고 섬기면서 농촌을 지켜온 것만 같아 한편으로 뿌듯합니다.”


일평생 농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사람과 마을을 섬겨온 그가 농촌지도자의 표상이 아닐까, 건승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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