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승용 농촌진흥청장

 

추석이 눈앞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제수용품도 장만하고 명절물가도 살필 요량으로 전통시장을 찾는다. ‘계절이 사람 사는 동네 중 가장 먼저 들른다.’는 시장에 가면 넉넉한 가을이 부려놓은 잡곡이며 과일, 산나물까지 성찬이 따로 없다. 시장 나들이의 소박한 재미는 한 줌 가득 덤을 얻거나 선 자리에서 껍질을 깎아 맛보라고 건네는 과일 한 조각의 살가움이다.


과일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즐기는 편이지만 한 입 베어 물면 시원하고 아삭한 식감과 단맛이 입 안 가득 맴도는 배를 유독 좋아한다. 약 3000년 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배는 전 세계적으로 20여 종이 있다. 크게 서양배, 중국배, 남방형 동양배로 구분하는데 각각 맛과 크기, 모양에서 차이가 난다. 배에는 항산화 능력과 면역기능을 향상시키고, 암 발생을 억제하는 플라보노이드와 폴리페놀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있는데 과육보다 껍질에 최소 25배가 더 많다고 밝혀졌다.


천연 감미료로도 통하는 배는 단백질을 분해하는 프로테아제라는 효소를 갖고 있어 육류음식을 부드럽게 하는 연육제로도 쓰인다. 특유의 단맛으로 생과를 채 썰어 무침요리에 넣으면 설탕 사용량을 줄일 수 있어 ‘건강음식의 감초’ 역할도 한다. 또한, 배에는 피부 미백에 효과가 있는 알부틴 성분을 비롯해 기관지를 보호하고 대사성 장애를 개선하는 여러 기능성 성분도 함유되어 있다.


배 소비가 가장 많은 추석명절을 전후해 시중에 선보이는 품종은 ‘신고’배다. 9월 말(남부지역)부터 10월 초(중부지역)가 적정 수확기인 ‘신고’배는 우리나라 전체 배 재배면적의 86.6%를 차지할 만큼 일반적인 품종이다.

하지만 추석이 일찍 든 해에는 부득이하게 수확을 앞당기는 바람에 덜 익은 채로 시장에 나올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결국 예민한 입맛의 소비자들은 이른 추석에도 입이 즐거운 새 품종의 등장을 기다리게 됐고 생산자 입장에서도 유통과 재배가 쉬운 새 품종의 보급을 희망했다.


농촌진흥청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동시에 만족시키며 이전의 ‘신고’배와 비슷한 재배 및 유통이 가능한 고품질의 품종을 개발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이른 추석용 고품질 배인 ‘신화’와 ‘창조’가 올해 추석 선물용으로 시장에 첫 선을 보여 이목을 끌었다. 우리나라 배 산업의 판도를 바꿀만한 경이로운 ‘신화를 창조하자’는 바람을 담아 자신 있게 출하한 우리 배 ‘신화’는 겉모양이 매끈하고 상온에서 한 달 정도 보관해도 걱정 없을 정도로 저장하기도 편하다. ‘창조’배는 껍질이 얇고 단맛과 신맛이 조화로우며 과육이 연하고 즙이 많아 배 고유의 장점을 고루 갖췄다.


농촌진흥청은 이들 품종의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품종별로 맞춤형 재배매뉴얼을 개발하고 주산지를 중심으로 신품종 시범 농가를 육성했다. 주로 경기도 안성과 전남 나주, 해남에서 재배된다. 앞으로 배 ‘신화’, ‘창조’가 본격 유통되는 1~2년 후에는 맛과 상품성을 다잡고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된다.


‘배 먹고 이 닦기’라는 속담이 있다. 배를 먹으면 이까지 닦인다는 말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로움을 얻는다는 뜻도 담겨있다. 배에는 석세포라는 물질이 들어있다. 배 석세포는 어린 과실이 이상 현상에서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특별한 조직으로 배를 먹을 때 느껴지는 거친 식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농촌진흥청은 세계적으로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는 미세 플라스틱이나 화학연마제의 대체물질로 천연소재인 배 석세포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배 석세포는 자연에서 분해되고 각질 및 플라그 제거 등의 효과도 증명돼 배 가공산업의 활로를 밝게 한다. ‘백문(百聞)이 불여일식(不如一食)’이라고 했다. 올 가을, 우리 배 ‘신화’ ‘창조’를 맛보는 즐거움을 누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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