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놈의 짐승은 못 먹는 게 무얼까요? 멧돼지처럼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잡식성도 아니면서 이젠 밭에 심어놓은 모든 작물이 마치 제 식당의 메뉴인양 이것도 맛보고 저것도 맛보면서 찝쩍거리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상식으론 옥수수나 고추, 감자 등은 즐기는 먹이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어느 날 가뜩이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망쳐버린 옥수수 밭에서 고라니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학비료도 안 주고 퇴비도 부족하고, 땅도 척박한 곳에서 겨우 가슴높이로 자란 옥수수가 이놈들의 표적이 된 겁니다. 아직 익지도 않은 작은 옥수수 알갱이를 물어뜯어 질겅질겅 씹어놓았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멧돼지들이야 한번 나타나면 모든 밭이 초토화되니 아예 포기하고 말겠는데 이놈들은 조금씩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피해를 입히니 나중엔 미칠 지경이 돼 버립니다. 오죽하면 노루망을 구입해 고구마라도 살리려 했겠습니까. 그래도 설마 옥수수까지 망가뜨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고추도 먹어치운 사례가 있다는 얘기도 들리니 조만간 우리 밭 고추도 성치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날은 더운 정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불을 퍼붓는 듯 뜨겁습니다. 해가 비추기 시작하면 감히 밭에서 뭔가 일을 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듭니다. 새벽녘 한 두시간 풀을 베든, 물을 주든 그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의 전부입니다.

이러니 작물이고 뭐고 사람이 죽을 지경이고 만사가 귀찮은데 고라니까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니 악에 바친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먼저 살던 동해집에서 사용하던 쥐틀을 옥수수 밭 여기저기에 설치하고는 다리몽둥이라고 걸려 부러지는 상상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가 되긴 했습니다만 어디 그게 제 뜻대로 되기나 하겠습니까.


귀신이 따로 없습니다. 용케도 쥐틀이 놓인 자리는 피해 옆자리 옥수수를 부러뜨리고 열매는 질겅질겅 씹어놓은 걸 다음날 아침에 발견한 집사람은 결국 특단의 대책으로 나머지 옥수수라도 건지려면 노루망을 둘러치자고 합니다. 폭 1.5미터, 길이 50미터인 노루망은 고구마밭을 덮고 조금 남아 있긴 하니 과연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옥수수를 건지기 위해 남은 노루망까지 사용해야 하나 망설여지긴 했지만, 결국 폭염에 고추지지대를 박고 노루망 길이가 되는 만큼 둘러치기는 했습니다. 저야 그까지 옥수수 그만 포기하고 말지 뭐 이 폭염에 고생을 하느냐고 집사람과 언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늘 그렇듯 승리는 집사람 몫입니다.


고라니가 멸종위기 동물이라는 말을 하면서 ‘고라니가 뛰노는 어쩌구 저쩌구..’를 주장하는 이들은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책상머리들입니다. 도대체 저 드넓은 중국대륙에 겨우 몇 만마리에 불과하다는 고라니가 우리나라에는 70만 마리가 넘는다니 어찌된 일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만큼 자연보호가 잘 돼 고라니들이 번영을 구가하게 된 셈이니 책상머리들 정책이 성공을 거둔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아직까지 들깨는 이놈들 먹이리스트에 올라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언제 또 추가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태풍이 몰고 온 비가 한바탕 쏟아진 덕에 겨우 숨만 붙어있던 들깨들이 쑥쑥 자라기 시작합니다. 폭염에 헐떡이며 며칠에 걸쳐 심은 들깨모종들도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 안심을 하기는 이릅니다.


돌덩이처럼 단단했던 밭이 푹신해졌지만 고라니 발자국도 덩달아 여기저기 찍히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물에 대한 학습효과가 있는 고라니들인지 그물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지만 집사람이 정성들여 심은 토종 동부나 팥 모종들을 망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빨리 옥수수 밭을 정리하고 노루망을 걷어내 집사람의 새 밭에 둘러쳐야 될 모양입니다.
순한 눈망울로 사람을 홀리지만 단말마 비명보다 더 듣기 싫은 울음소리가 이놈들의 정체입니다. 아무리 포수들을 동원해서 잡는다 해도 번식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특단의 대책이 없이는 고라니와의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모양입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