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씨를 비롯한 온갖 작물의 씨로 모종을 내는 일은 집사람의 취미활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추씨야 그나마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토마토의 경우는 씨를 별도로 골라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쨌든 발아를 시키는 걸 보면 놀랄 만합니다.


전문적으로 모종을 내 판매를 하는 이들이야 시설을 잘 갖춰 대량으로 생산하지만 오직 거실의 온기와 베란다 햇빛만으로 모종을 내서 기르는 일은 힘들고 귀찮은 게 사실입니다.
잘 마른 고추에서 털어낸 씨앗을 물에 적신 키친타월에 펼쳐놓고 햇볕에 노출되지 않도록 반으로 접어 덮고 수시로 물을 갈아주면서 뿌리가 나오는지 살펴 핀셋으로 포트에 옮겨 심는 게 집사람이 모종을 내는 방식입니다.

옥수수 같은 경우는 하루나 이틀 정도 물에 불려 뿌리가 나오는 것들만 골라 포트에 옮겨 심으면 되지만, 작두콩 같이 껍질이 단단하고 씨앗이 큰 건 며칠이고 물에 불려도 발아가 쉽질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싹이 날지 안 날지 알 도리가 없어 하나씩 둘씩 늘리게 되고 서너 개 정도 심을 예정이었던 게 운 좋게도 어느 날 전부 싹이 나버려 괜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2월부터 시작되는 모종내기는 4월에 접어들면 그 양이 점점 많아져 모종판을 베란다에 내놓았다 다시 거실로 들이는 일만해도 일과의 큰 일 중 하나가 돼버립니다. 고추모종을 내는 일이 매년 늦어 올해는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2월부터 시작했더니 오히려 웃자람을 걱정해야 될 판입니다. 워낙 고추농사는 짓기가 힘들어 작년에도 50포기 정도 심었음에도 불구하고 탄저와 고추노린재로 농사를 망쳐 금년에는 포기할까 했지만 고춧가루 가격을 생각하면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얘기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조금씩 늘린 고추모종이 100주가 넘어버렸습니다.

전문적인 모종생산자야 포트를 몇 번씩이나 옮겨 심으면서 길러낸다고 합니다만 저희들이야 처음부터 심어놓은 걸 옮길 엄두를 못 내니 빨리 꽃샘추위가 물러나 밭에 정식하기만 바랄뿐입니다. 고추와 동시에 시작한 옥수수모종도 금년에는 예상보다 잘 자라 모종판 위에서 휘청거려 이 또한 날씨 걱정거리를 더하게 됩니다.

오크라도 비트도 이런 식으로 포트에 심겨지고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사실 모종판이 늘어날수록 베란다로 내놓았다 들이는 일이 때로는 귀찮아지는 게 당연합니다. 문제는 집사람 눈에는 그저 예쁜 자식들로만 보인다니 괜히 짜증이라도 냈다가는 농부가 그럴 수 있느냐는 핀잔만 돌아올 뿐이니 그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상책입니다.


베란다에는 온갖 모종판들이 햇볕을 조금이라도 잘 받기 위해 빨래건조대는 물론 화분받침대까지 총동원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밭으로 나가야 될 텐데 아침저녁으로 기온차도 심한데다 금년은 이상하게도 꽃샘추위가 오래 지속돼 올 농사도 순탄치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마음까지 불편해집니다.


그래도 봄은 봄입니다. 거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산등성이가 어느덧 연두 빛으로 물들고 산 벚꽃도 만발합니다. 이틀간 내린 비 덕분에 종묘상에서 구입해 노지에 직파한 완두콩이 새싹을 내밀었습니다. 매년 볼 때마다 감탄하지만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은 정말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4월에 눈이 내리는 일이 여기는 흔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파종한 작물들이 잘 버텨주고 있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마른 풀과 뿌리를 걷어내느라 근 한 달여 고생했지만 경운기를 소유하고 있는 옆집 주인장의 친절한 밭 갈아주기 덕분에 손쉽게 옥수수 심을 자리를 정하고 멀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동네가 농촌마을이 아닌 탓에 농사짓는 이가 많지 않지만 다행히도 좋은 이웃을 만나 편하게 밭을 갈았으니 이것도 복입니다.


작년에 아껴서 보관해놓았던 계분퇴비를 수레에 싣고 고추 심을 곳 이랑을 미리미리 만들고 멀칭작업까지 마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됩니다.
풀을 방치했다 올해처럼 고생한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가능한 많은 작물을 밭에 심어야 될 텐데 날씨와 몸이 받쳐 줄는지는 오직 하늘만 알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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