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파솔 라-솔 미파솔 미파미도 레미레, 미파솔 라라솔 …. 피리를 잡으면 아직도 손가락이 음계를 따라 저절로 움직일 것만 같다. 한 옥타브, 낮은 도에서 높은 도까지 8음계를 벗어나지 않는 노래. 두 팔을 벌렸다 머리 위로 뻗어 손뼉을 치기 알맞은 사분의사박자, 노랫말도 간단명료하고 어렵지 않아 금방 따라 부를 수 있는 곡, 이른바 ‘떼창’ ‘떼춤’으로 신나게 춤추며 부르는 노래, 으레 그렇듯 첫 소절은 아는데 제목은 잘 몰라 그냥 ‘아랫집 윗집’으로 기억하는 노래. 어효선 작사, 정세문 작곡의 <서로서로 도와가며>는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린 노래다.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내 일처럼 여기고 / 서로서로 도와가며 한 집처럼 지내자 / 우리는 한 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우리 집 너희 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 잘못이 있어도 모두 용서하고 타일러 / 서로서로 도와가며 형제처럼 지내자 / 우리는 한 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돌을 수직으로 높게 쌓아올린 담벼락이야 아흔아홉 칸 양반가나 구중궁궐에나 있을 법했고, 있으나 없는 듯 있으나마나 한 울타리는 보통 백성의 것이었다. 개똥아, 친구가 부르면 에돌아가지 않고 울을 비집고 곧장 뒷집 마당에 당도했다. 수수떡 팥죽 감자수제비 넉넉히 했다며 울 너머로 나누던 정은 얼마나 살가웠던가. 높은 담이 차단과 단절의 현실이라면, 울타리는 경계의 표시일 뿐 소통과 교류의 곁가지였다.

여러 이유로 <서로서로 도와가며>는 어린이들의 전유가 아니다. 음치라도 웬만큼 음을 맞춰 따라할 수 있는 노래, 남녀노소 누구라도 잘 부를 수 있다는 면에서 명곡 반열에 올릴 만하다. 집단가무가 어울린다. 상부상조의 전통을 계승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노랫말은 어른에게도 맞춤이다. 게다가 중의적이다. 일상을 노래하면서도 남북 분단의 비극을 초월해 한 겨레, 형제지간으로 잘 지내자는 뜻을 담았다.

약 30년 전, 대학시절 뒤풀이에서 한 번은 꼭 불렀던 노래로 기억한다. 노래방이니 반주니 하는 것들이 없을 때였으니 오로지 손장단과 목청으로 허공을 지배해야 했고, 독창보다는 합창이 제격인 노래가 많았다. 애타는 사랑, 피 끓는 청춘, 순수한 시절, 신명난 이야기, 절절하며 숭고한, 서글프고도 비장한 노래가 두서없다가도 어깨 걸고 마무리하는 노래가 몇 곡 있었다. 율동에 맞춰 혹은 활개 손뼉으로 토해내던 노래가 몇 있었다. ‘아랫집 윗집’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같은 노래였다. 한 민족, 겨레붙이에게 가시철망은 불가촉의 차단벽이 아니라 간단히 허물어뜨릴 허섭숭이 울타리에 지나지 않다.

대한민국과 온 국민이 바라는 ‘판문점 선언’이 될 지, 남북이 함께 합의하고 채택한 선언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역사적인 4·27 남북정상회담에 우리민족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특히 남북에 이어 5월엔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는 만큼 한반도 비핵화와 종전협정 등 70년 냉전의 고리를 끊고 평화와 화해의 시대로 진입할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남북정상회담 일주일 전에 있던 사건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공동체, 이웃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었다. 경북 포항의 한 어촌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명 ‘농약 고등어탕’ 사건이다. 한 60대 여성이 호미곶 돌문어 수산물축제 개막 직전 마을공동취사장에서 주민들이 먹을 고등어탕에 농약 150밀리리터를 넣은 혐의로 입건됐다. 그는 외지인이 아닌 마을 부녀회장을 지낸 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이웃의 뭇 생명을 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대범죄가 아닐 수 없다.

수십 년을 한 마을에서 살아온 이웃인데 왜 그랬을까, 서로 부대끼며 갈등과 반목을 하기도 하고 다시 화해하기도 하는 것이 인생사일 터에 극단적인 행위까지 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것이 정녕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마을공동체의 실패상이요 실체인 것인가, 이로써 농촌공동체의 복원은 허무맹랑한 제창에 지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면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와 평화를 이끌어내며 ‘민족공동체’를 가꾸려는 겨레붙이들의 노력은 허사인 것인가 비약을 거듭하며 심사숙고할 일이다.

왠지 뿌리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청송, 상주에 이어 또다시 마을공동체의 붕괴를 목도해야만 했다. 농촌은 부모와 같다고 여겼다. 도시에게, 도시에 사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며 희생하는 어머니, 혼탁한 영혼일지라도 언제든 품어주고 맑게 씻기는 안식처, 무엇보다 먹을거리와 생명을 나누고 사람을 사람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바로 농촌의 다른 호칭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동체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농산어촌 마을공동체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농업인을 포함한 농촌은 자문해봐야 한다. 소외, 박탈, 강요된 희생이 지속하면서 농촌은 피폐해지고 이웃지간은 삭막해졌다. 위정자를 비롯해 책임을 물을 이도, 탓할 일도 많다. 그럼에도 선한 이들은 공동체의 유지나 복원을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서로서로 도와가며 형제처럼 지내는 마을, 나눔과 섬김의 밥상공동체는 우리의 소원이 아니던가. 아랫집 윗집, 남쪽 큰집 북쪽 작은집 모두 베풀고 품어주는 날. 그날이 오길 염원한다. 아파트에 사는 이들의 염원도 다르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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