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모친께서 장은 직접 담가야 된다며 부뚜막에서 메주콩을 삶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불 조절이 관건인 메주콩 삶기는 모친을 부뚜막에 종일 붙들어 매놓았지만 적당히 삶아지는 메주콩의 구수한 냄새는 손바닥에 한줌 받아 쥔 뜨거운 콩알 맛만큼이나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지금이야 도시에서 메주콩을 삶아 장을 담그겠다는 시도조차 어려운 환경이고, 시골에서도 전문적이고 상업적으로 이뤄지는 게 보통이라 가정마다 특색 있는 장맛을 보기란 쉽질 않습니다. 대형마트 진열대에 늘어서 있는 식품회사들의 장맛이야 거기서 거기니 어쩌다 전통시장이나 인터넷쇼핑을 통해 접하게 된 장맛이 특별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시골로 귀촌한 분들 중 늘어선 장항아리들이 어마어마해 입을 딱 벌릴 정도의 큰 규모로 장을 담가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야 그저 TV드라마려니 생각하고 말지만 때론 부럽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사실 좋은 장항아리 하나 값이 몇 십 만원을 호가하니 늘어선 항아리 값만 얼추 계산해 봐도 엄두도 못 낼 일이기는 합니다.

어쨌든 집사람에게 흰콩을 구입해 삶고 메주를 띄우는 것 까지는 어려운 일이지만 좋은 메주를 구입해 장을 담그는 일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연례행사입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판매할 정도의 양을 담그는 건 아니어서 대개 메주콩 한말 정도가 전부지만 과정은 꽤나 복잡해 장 담그는 날도 십이지 동물 중 꼭 말날(馬日)을 택해야 되니 미리미리 일기예보에도 신경을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낭패 보기가 십상입니다. 말날 장을 담그는 것은 말의 피가 진한 붉은 빛이어서 장 색깔이 그처럼 좋아지고, 말날 발음이 맛있다는 말과도 연결된다 해서 날을 잡는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래도 괜히 지키지 않으면 꺼림칙한 것 같아 말날을 지키게 된다는 게 집사람의 얘기입니다.

수도가 마을관정이라 음용수는 간이 정수기를 이용해 현미차나 보리차 등을 넣어 끓여 먹는 관계로 장 담그기 용 소금물은 생수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장맛을 결정하는 요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좋은 메주와 좋은 물, 그리고 장이 숙성될 주변 환경이 어떠냐에 달려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항아리는 토치를 이용해 소독하고 숯과 건고추, 대추 등을 준비해 소금물을 붓고 보통 메주가 떠오르지 않도록 누름판 용도로 쓰는 대나무를 구하지 못해 가지치기한 매실가지를 껍질을 벗겨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한말 메주로 장을 담기 위한 항아리 크기는 소금물을 가득 붓고 나면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장항아리를 앞집 보일러 연통과 가까운 곳에 놓았던 것은 햇볕이 아침 일찍부터 잘 비치는 가장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몸이 안 좋은 주인장이 오랫동안 집을 비워두고 있었고, 날이 조금 풀리면서 모처럼 집에 들른 마나님이 보일러 전원을 꺼뒀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약속이 자녀들이 집안을 드나들면서 지켜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하기야 집이란 게 장기간 비워두면 폐가가 될 확률이 높아지니 자녀들로서는 집안 청소도 하고 이것저것 살피려면 집안이 따뜻하게 보일러를 틀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자 그러니 아무리 항아리뚜껑과 유리뚜껑을 겹겹이 덮어놓아도 미세한 끄름이나 이물질들을 막기는 역부족한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항아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져 버린 거지요.

밭에서 마른 풀들과 씨름하느라 미처 항아리 옮기는 작업을 도와주지 못했더니 집사람이 스스로 들통에 소금물을 나눠 담아 무게를 줄인 후 짐수레를 이용해 항아리를 옮겼노라고 말해 깜짝 놀랐습니다. 웬만하면 전화해서 같이 옮기자고 얘기할 텐데 괜히 밭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 부르기가 뭐해서 혼자 했다는 겁니다. 촌에서 살다보면 이런저런 요령을 터득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부디 이런 정성을 봐서라도 장맛이 기가 막히게 잘 되길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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