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차라리 까맣게 잊었노라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 해량해달라고 하라.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에 없다 시치미 떼는 이보다 낫다. ‘진짜 망각’은 그리하여 기억을 되살리고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잉태한다. 그러나 ‘가짜 망각’은 기억하되 잡아떼는 나쁜 구실이 됨으로써 서로 절망을 떠넘긴다.

약속. 차라리 환심을 사려 호언했노라고, 사람은 다 지키지 못할 맹세를 남발하지 않느냐고 억울해하라. 언제 그랬냐고, 그럴 리가 없다고 발뺌하는 이보다 낫다.

‘진짜 약속’은 그리하여 회한과 속죄의 땅에 다시 싹을 틔운다. 그러나 ‘가짜 약속’은 후회와 분노로 마냥 들끓는 도가니에 서로를 가둬버린다.
존경하는 농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듣기 좋은 소리로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농업이 천하의 근본 맞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갈수록 농업예산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1995년 농어업 예산은 국가 전체예산의 16퍼센트였습니다. 그런데 2017년 농업예산은 전체예산 400조원 가운데 겨우 3.6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농가소득은 제자리걸음입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농촌은 교육과 의료, 교통과 문화, 모든 점에서 낙후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처참한 현실이 농자천하지대본입니까? 농업홀대, 농민무시, 농정실패가 농자천하지대본일 수 있습니까?

연설에 놀랐다. 제한된 시간에 많은 주장을 전하기 위해 꽤나 고심했구나,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단박에 휘어잡는 도입부, 군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공감능력, 이제 어떤 비판을 쏟아내든 무슨 대책을 내놓든 그의 연설은 사람들을 휘어잡을 것이다. 누군가 써줬을 텐데, 책 읽듯 무미건조한 일장연설이 아니라 나름대로 행간을 이해하고 웅변하고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10년 동안 우리 농민들은 버림받아왔습니다. 무관심, 무책임, 무대책. 그야말로 3무정책이었습니다. 농산물 개방으로 인한 농업시장 불안, 물가안정의 희생양으로 인한 농가소득 불안, 비룟값 사룟값 자잿값 상승으로 인한 경영불안, 태풍 냉해 에이아이 구제역 등 각종 재해불안, 4대 불안요소를 해소하는 데 농정역량을 총 집중하겠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농업이 희생산업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농민의 눈물과 희생을 항상 마음에 담겠습니다, 여러분!

아, 3무정책, 4대 불안요소 해소, 그리고 농민의 눈물과 희생을 항상 마음에 담겠다니 명문도 꽤 그럴싸한 명문임에 틀림없다. 구구절절 심금을 울린다. 여러분! 호소력 짙은 화룡점정 ‘여러분’이라니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겠다. 환호와 갈채가 뒤섞인 가운데 한쪽에선 문재인, 문재인 연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 딱 1년 전, 2017년 4월 13일, 한 농업인단체가 마련한 제19대 대통령선거 후보 농정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행한 연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눌한 듯하나 단호하고 명확한 언어를 구사하는 이다. 그래서 명토를 박아 연설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 취임직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불러낸 연설도 그렇고, 8·15 광복절과 3·1절 기념사에서도 독립투사와 의사들의 명토를 담았다. 이런 까닭에 그의 연설은 허투루 여기지 못한다. 한 마디 한 마디 망각하기 어려운 언약, 진심어린 약속으로 와 닿기 십상이다.

이태도 아니고 1년 전,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농업인 여러분 앞에서 약속’했다. 농업은 국민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국민 생명산업이고 식량주권을 지키는 안보산업이라고, 지난 10년간 잘못된 농정을 철저하게 뜯어고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대통령 직속 농어민특별위원회를 설치하겠다,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농업비서관을 임명하겠다, 농업 전반에 걸쳐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겠다고 했다. 했다, 약속했다.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일곱 가지를 약속했다.

쌀 농가소득을 보장하겠다, 공공급식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겠다, 농촌 주거환경을 개선해 살기 좋게 만들겠다, 아이 키우기 좋고 건강한 농촌을 만들겠다, 구제역 에이아이 등 가축전염병 방역체계를 강화하겠다, 농업현장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와 질병은 이제부터 국가가 책임지겠다, 농생명산업 활성화를 통해 농업의 미래를 만들겠다, 이 방안 실현을 위해 농민단체와 시민, 정부가 함께 고민하고 책임지는 농정을 펼치겠다. 어떻게 하겠다, 무엇을 만들겠다, 책임지겠다, 그러니 함께 해주오.

매니페스토(manifesto). 구체적인 선거공약을 일컫는다. 증거 또는 증거물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생겨난 낱말이라고 한다. 대개 선거과정에서 정책목표, 이행가능성, 예산확보 등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후보자와 유권자 간 ‘계약’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거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매니페스토 운동이 벌어지고는 한다.

농업인들은 지난 1년간 줄기차게 요구했다. 대통령 직속 농어업특별위원회를 설치하라고, 농업회의소를 설치하라고, 농가소득을 보장하라고, 아이 키우기 좋은 농촌을 위해 국공립 보육시설을 확충하고 지역거점마다 분만지원센터를 설치해달라고, 산업재해 수준의 사회보험 혜택을 보장하는 농어업산업재해 보험제를 시행하라고. 그저 공약을 잊지 말라고, 약속을 지키라고 주문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무관심, 무책임, 무대책 3무정책과 4대 불안요소는 그대로다. 농정수장이라는 장관과 청와대 농어촌비서관은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대통령과 농업인은 그렇게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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