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에 비해 추위도 심하고 겨울 내내 눈조차 구경할 수 없는 겨울가뭄이 마른 풀들만 무성해진 밭을 더 황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지방 토박이들도 올해처럼 눈이 단 한 번도 안 내린 적은 처음이라며 언감생심 농사는커녕 마실 물마저 말라버릴까 걱정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광역수도가 아닌 마을관정은 지속되는 가뭄에 수압이 점점 낮아져 수도꼭지에서 쫄쫄 거리니 괜한 걱정은 아닙니다.

몇 해 전 먼저 살던 곳에서도 쉴 새 없이 퍼붓던 눈이 처마 밑까지 쌓여 눈과의 사투를 벌였던 기억이 생생할 정도였는데 최근 2,3년 동안 겨울가뭄이 지속되고 있어 뭔가 기후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입니다.

제주도에 폭설이 내리면 지인들의 SNS 에서는 마치 강원도 산골 풍경 같다는 글이 쇄도하지만 이젠 그 말도 뒤바뀔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2월의 마지막 날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싹 말라있는 개울 한복판 겨우 고여 있는 웅덩이 속에 살아가고 있는 버들치들이 숨을 쉴 여지가 생겼습니다만  마음 놓고 헤엄칠 정도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도 종일 내린 비덕에 웅덩이 크기가 조금은 커진 게 다행입니다.

3월이 시작됐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농사준비를 해야 될 시기가 온 거지요. 다리를 건너 밭으로 나갔습니다.

작년 게으름 핀 흔적이 온 밭에 가득합니다. 말라비틀어진 온갖 종류의 풀들이 빈틈없이 바닥을 덮고 있으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매서운 추위가 풀뿌리를 더욱 단단히 붙들어 맺는지 손으로 뽑기도 수월치 않습니다. 작년에 엉겁결 신세를 졌던 동네 트랙터는 전임 이장이 관리했었는데 얼마 전 마을회의에서 갑론을박 끝에 트랙터 유경험자가 전임이장뿐이라며 다시 관리를 맡기기로 결정보기는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부탁하기엔 꺼림칙한 요인들이 있어 그냥 혼자 해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엄두도 나지 않았던 일이지만 어쩝니까 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괭이삽과 쇠스랑은 물론 가능한 모든 도구들을 동원해 묵은 풀밭과 결연히 마주할 수밖에요. 전체를 바라보면 그저 한숨뿐이지만 그래도 나름 블록을 정해 괭이삽으로 파고 손으로 뽑아내니 조금씩 밭 본연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겨우내 먹고 놀았던 몸뚱이는 밭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열심히 땅 파서 풀뿌리 뽑으라고 부추 키고 있지만 이놈의 몸은 아이고 허리야를 연발하니 진도가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열 번 삽질이 버거운 것은 겨울동안 늘어난 몸무게 탓이 분명합니다.

젊은 시절엔 아무리 먹어도 몸무게가 늘지 않더니만 늙어 귀천할 시기가 되니 먹는 대로 살이 되니 먹는 재미마저 놓아야 되나 괜히 서글퍼집니다.

밭 여기저기 여러 해살이 삼채나 도라지까지 심어놓아서 그 곳은 호미로 파내야 되니 더디기가 거북이 같습니다. 철부지마냥 또 때를 놓쳐 농사 망치지 않으려면 아무리 허리가 아프더라도 삽질을 계속해야 되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밭에 나가 오후 내내 삽질을 해봤자 쉬는 시간 반, 일하는 시간 반이니 며칠이 지나도 정해놓은 분량 삼분지 일이 성과의 전부입니다.

누군가는 완두콩을 파종하면 농사가 시작이라는데 저야 감자심기가 시작이니 적어도 감자 심을 밭은 만들어놓아야 일단 숨을 고를 텐데 이도 수월치 않으니 세월은 역시 세월답게 몸에 흔적을 남깁니다.
지난 해 거둬들였던 감자 중 씨감자용으로 보관했던 게 전부 썩어버리고 말았으니 장날 농약상에 나가 반 박스라도 사야와 될 판입니다.

밭주인이 지난여름 낙상하면서 등뼈가 조각나는 중상을 입고 반년이 지나도록 귀가 못하고 결국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됐노라고 마나님이 전해 왔습니다.

결국 정신없는 와중에 밭주인이 마땅히 해야 될 퇴비신청기일을 놓쳐 올해 퇴비는 비싸게 구입하든가 작년에 아껴뒀던 퇴비만으로 농사를 해결해야 될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도 다 제 복이니 그러려니 하고 다시 마른 풀밭과 맞서 삽질을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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