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만큼 빠른 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세상에서 이보다 빠른 건 없노라고 뭘 내세워 받자 어디 세월의 속도와 견줄 수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이 지구의 자전속도가 적도에서 대략 시속 1,700km라고 밝혀냈으니 과학도 세월의 빠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지요.

자기 나이에 km를 붙이면 그게 세월의 속도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어 어 하다가 벌써 한해가 다 가고 말았습니다. 산속 외딴 집을 떠나 처마 끝이 마치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듯한 마을로 이주한지도 어느새 1년여가 다 되고 그사이 벌어졌던 이런저런 일들도 다 지나간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임 이장이 재판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는 얘기도, 그로 인해 새롭게 이장이 되겠노라고 서명을 받아갔던 펜션 텔 사장도 불과 2개월 여 만에 이장 직을 사임했다는 얘기도 우연히 옆집 주인장으로부터 듣고서야 알게 된 마을의 이야기였습니다.

어쨌거나 시골마을의 연말연시는 뭔가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시기입니다. 1년이 지나면 마을 결산보고를 전체 마을주민이 모인 가운데 이장이 하게 되어 있는데 벌써 이장이 3번째 바뀌어 제대로 결산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더더욱 긴장감이 높아질 밖에요.

사실 도회지에서야 서로 제 먹고 살기도 힘에 겨워 동네일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큰 관심이 없는 게 정상이지만, 시골에서는 연말결산 총회야말로 자기주장을 펼 수 있는 최고의 기회기 때문에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마을처럼 이장자리가 1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3번이나 바뀐 마을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 사회적 현상은 시골이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 뭔가 관심을 기울여 스스로 몰두할 수 있는 공동체적 꺼리가 부족하다보니 서로에게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게 되고 그로 인해 타인의 삶을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서 불필요한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패거리 문화는 작은 마을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여곡절 끝에 새롭게 다시 이장이 선출됐지만 그이가 마을 전체의 찬성으로 뽑힌 건 아닌 모양입니다. 저야 누가 이장이 되던 그 사람 됨됨이를 알 도리가 없어 그저 동의서 들고 온 사람과 불편하지 않으려 사인을 한 입장이니 가만히 돌아가는 모양새만 볼 뿐입니다.

이랬던 저랬던 한해도 숨 가쁘게 마지막 날을 향해 달려가는 어느 날 마을회관에서 만동회가 열리니 꼭 참석하라는 반장의 전갈이 왔습니다. 사실 만동회가 뭔지 알 수 없어 나중에 사전도 찾아보긴 했지만 아마도 대동회나 마을결산 총회를 지역마다 달리 부르는 명칭이거니 짐작만 하면서 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새롭게 선출된 이장이 회의를 주관하고는 있지만 노인회장이거나 고문이거나 뭔가 타이틀이 붙은 이들은 물론 골목길에서 조용히 지내던 이들도 할 말들이 많으니 회의는 길어질 밖에요. 항시 돈이 문제의 초점임은 어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우나탕에서 알몸으로 고스톱을 쳐도 돈 딴이와 잃은 이의 계산이 맞지 않는 판에 마을경비가 명확하게 사용됨을 따지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고성이 오가고 자칫 파국으로 갈 판에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고 현재부터 모든 사안을 명확하고 깨끗하게 처리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회의가 끝나게 됐습니다. 물론 몇 몇 이들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대세가 그리 기울어졌으니 따를 밖에요.

이런 자리에서 술이 빠질 턱이 없습니다. 잔이 돌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괜히 한잔 술에 거나해져 불필요한 마찰이 생길 수도 있어 그저 신입주민은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며칠이 지나고 반장이 다시 대문을 두드립니다. 만동회를 무사히 마쳤으니 마을기금으로 집집마다 화장지 한 묶음씩 기증한다고 회관으로 바로 오라고 하더군요.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는 입장에서 이게 정말 웬 떡입니까. 슬리퍼 끌면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당분간 화장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얄팍한 이기심이 작용하는 촌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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