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땅 밑에서 자라야 되는 작목을 심고 과연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농사경험이 많은 이들이야 겉으로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도 알아채겠지만 저처럼 농사경험이 일천한 이야 금방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고라니나 멧돼지가 망쳐놓은 거야 누구라도 알 수 있지만 보기에는 멀쩡해 신경을 안 썼던 땅콩이 하루아침에 초토화 됐으니 아직도 초보 농사꾼 티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어린 시절 강가 모래밭에 심어놓은 땅콩 밭을 서리해 먹던 기억이 새삼스러워 늘 땅콩을 심어야지심어야지 벼르고만 있다가 작심하고 장에 나가 구입한 모종 한 판을 처음으로 밭에 정식했었습니다. 감자나 옥수수, 고구마 등은 그래도 경험이 있었던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을 정도는 건지곤 했는데 이 땅콩은 고생만 시키고는 단 한 개의 땅콩 알조차 건지질 못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땅콩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 심었던 동해에서는 다른 작물보다 더 신경을 써 극심한 가뭄에도 이놈들은 늘 물을 줘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 나가보니 알맹이가 밖으로 나와 있는 게 몇 뿌리 보여 다시 흙을 덮어 주면서 수확 때를 기다려 호미를 들고 나섰지만 캐낼 거라곤 한 톨도 없는 빈 뿌리만 올라오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지요.

주변에 땅콩농사를 짓는 이도 없었던 터라 인근에 거주하는 아는 이에게 물어보니 범인은 까마귀일 수도 있고, 두더지나 밭 쥐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밭에 내려 앉아 뭔가 쪼아대던 까마귀를 보면서 덩치가 보통이 아니구나 감탄하던 기억이 나긴 했지만, 설마 까마귀가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 힘을 줄 필요도 없이 뽑혀 올라오는 땅콩줄기는 결국 퇴비장으로 가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달랑 알맹이 하나 든 꼬투리가 일 년 농사의 전부였으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한심스런 생각도 들더군요.

다시는 땅콩 따위는 심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이곳으로 이사와 실패했던 기억은 지우고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심어보리라 의욕 충만해 제법 비싼 값 치루고 다시 땅콩 모종 한 판을 잘 심어놓았었습니다. 물론 어김없이 찾아온 봄 가뭄에도 동네사람들 눈치 보면서 길어온 한 양동이 물은 땅콩모종 차지였습니다.

장마시기에는 비가 찔끔거리더니 또 늦장마가 계속되고 결국 밭 전체는 풀밭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비 핑계로 풀 관리를 못했으니 그 결과는 참담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가 돼 버렸습니다. 키만큼 자란 풀을 헤치고 땅콩 심은 곳으로 가보니 미처 여물지도 못한 땅콩 알맹이들이 밖으로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닙니까.

무시로 드나드는 물까치나 꿩도 풀숲을 헤치고 쪼아 먹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옆 밭에 저보다 땅콩을 많이 심은 이가 쥐가 그랬을 거라고 일러주더군요. 같은 밭에서 옆 밭은 멀쩡한데 왜 내가 심은 땅콩만 100퍼센트 피해를 봐야 하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혹자는 비닐멀칭을 안 해서 굼벵이나 들쥐들이 파먹었다고도 하지만, 옆 밭도 똑 같이 비닐멀칭은 하지 않았으니 제가 이렇게 또 실패한 것은 전적으로 제가 제대로 기르지 못한 탓입니다. 옥수수를 심은 밭 옆에 심었던 땅콩은 늦장마를 핑계로 옥수수 대도 거둬들이지 않았으니 사방으로 잡초는 키만큼 자랐고 그 사이에서 햇볕조차 볼 수 없었던 땅콩이 제대로 자랐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나마 동해에서 처음 심었을 때는 뽑아보기라도 했건만, 이번에는 아예 뿌리가 땅에서 들려 줄기 전체가 시들고 있어 발로 툭툭 차면 옆으로 나뒹굴 정도니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는 알만한 노릇입니다.

가을에 접어들어 키만큼 자란 풀밭을 베다보니 땅콩 밭과는 거리가 있는 쪽에 땅콩 겉껍질이 군데군데 무더기로 보이는 게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어차피 망친 농사, 누가 그랬던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저 내년에는 땅콩을 안 심으리라 마음먹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집사람은 또 땅콩을 심자고 할 거고 저는 또 못 이긴 척 모종을 살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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