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처럼 자란 풀을 베어내고 헉헉거리며 일궈 낸 김장 채소밭에 배추모종 30포기와 무씨와 총각무 씨를 파종하고 나니 또 비가 하염없이 내립니다. 김장밭이라고 모양을 갖추려면 쪽파도 심어야겠기에 종묘상에서 팔지 않는 쪽파를 사기 위해 북평장까지 나갔었습니다.

매년 가격이 오르기는 하지만 올해 가격은 작은 됫박에 5천원이나 합니다. 작년만 해도 4천원이었으니 무려 25%나 인상된 셈입니다. 하기야 오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길러 내기도 힘든데 너무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그냥 사다가 심을 밖에요.
농사짓기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환경인데 정부정책은 누가 정권을 잡든 매 한가지인 것 같으니 아무리 농업이 미래의 블루오션이라고 주장한들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아이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나라, 둘만 낳아 잘살자 라는 표어가 국가시책이었고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한술 더 뜬 정책표어였지만, 결과는 인구절벽으로 국가존립마저 위태로운 나라가 된 겁니다. 그저 자동차와 핸드폰만이 최고의 가치니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은 늘 정책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아이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듯 먹거리마저 절벽이 되는 나라가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일 겁니다.

불과 몇 십 년 앞조차 예측치 못한 정책의 후유증은 현 세대에서부터 위기로 몰아넣었으니 후대가 어찌 될 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각설하고 문제는 심어놓은 배추모종과 씨를 뿌린 무와 알타리무가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됐습니다. 5월에 심어놓은 고구마가 제법 자라 추석 무렵에는 수확을 해야 함에도 매일 저녁 고구마 순을 잘라먹는 고라니 등쌀에 잎이 자라지 못해 수확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판에 이번에는 무까지도 고라니 피해목록에 추가된 겁니다.

아무리 야생동물이라고 해도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니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입니다. 제법 잎도 커지고 땅 속 무도 어느 정도 커간다고 여길 즈음,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에 밭으로 나가보니 무는 물론 알타리까지 여기 저기 뽑혀져 고랑에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한참동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니 집사람이야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긴 한숨만 내뱉을 밖에요.

정신을 차려 자세히 들여다보니 뽑힌 무가 잎은 잎대로, 뿌리는 뿌리대로 나뒹굴고 오직 줄기만 사라진 겁니다.

작년 동해에서도 비트를 심었다 고라니들이 줄기만 잘라먹는 바람에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비트는 땅속에 단단히 뿌리내린 덕에 뽑혀나가진 않아 조금이나마 건질 수 있었건만 무는 미처 자라지도 못한 놈을 건드려놓으니 자랄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이 이랑에서 몇 개, 저 이랑에서 몇 개씩 무를 뽑아 던져놓았으니 그나마 건드리지 않은 무라도 살릴 방도를 찾다가 결국 차양막으로 덮는 게 가장 현실적 방법이라고 여겨 저녁마다 차양막을 덮고, 아침에 벗겨내는 힘든 여정을 시작했긴 했습니다.

앞으로 또 이런 장기연휴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긴 추석연휴에 서울 사는 자식들이 내려와 신경을 못 쓴 것도 있고, 연휴 내내 빗줄기가 그치질 않아 차양막 덮는 행사를 건너뛰었더니 그야말로 밭은 초토화가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나마 남은 무라도 건지기 위해 또 저녁마다 차양막 펼칠 것인지 아님 포기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농사짓는 일이 야생동물 사료 제공하는 일이 돼서야 어디 농사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집사람이 용단을 내렸습니다. 남아있는 무 전부 뽑아 열무김치라도 담궈 먹는 게 남는 거라면서 이랑에 남아있는 무를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고라니에 거의 다 뺏기고 남아있는 거라곤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건진 게 어디냐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아마 오늘 저녁 고라니들도 갑자기 사라진 무밭에서 이게 뭔 일인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떼를 지어 뛰어 다니며 논을 망치고 밭을 망치는 이 고약한 짐승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서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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