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기가 진동하며 경고음을 울렸다. <긴급 재난 문자>다. 사무실 곳곳에서 거의 동시에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문자를 확인하니 지진발생 소식이다. 기상청 발신의 알림문자는 11월 15일 14시 29분에 포항시 북구 북쪽 6킬로미터 지역에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으니 여진 등 안전에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또 지진이네, 강도가 5.4나 돼, 큰일이군, 하는데 흔들림이 감지됐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 적잖은 진동이 있었으니 진원지의 피해가 클 것이란 예상은 어렵지 않았다. 지진과 함께 원전과 수능이 연이어 떠올랐다.

지난해 경주에서 몇 차례 지진이 발생했을 때도 많은 이들이 원전시설의 안전성을 우려했다. 원자력발전시설이 밀집된 지역이기에 아무리 내진시설이 잘 돼 있다고 해도 지진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경주, 울산, 포항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쭈뼛하는 까닭이다. 옛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최근의 일본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사고를 떠올리는 것도 비약이 아니다.

 수십 년 무탈했다는 경험치를 통해 원전의 안전성은 확보됐다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사진이나 화면에서 보는 원전시설만 하더라도 방사능을 잔뜩 머금은 모습이 제법 무시무시한데 가까이에 사는 이들은 건물이 휘청대고 외벽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얼마나 두려울까 싶기도 하다.

원전사고의 공포는 1986년 4월 25일 체르노빌에서 누출되기 시작했다. 원자폭탄의 위력이 어마어마한 살상을 저지르며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었다면, 체르노빌은 전쟁과 무관한 ‘사고’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사례다. 원자로 안전시스템 시험작업 중에 발생한 사고는 대규모 폭발과 함께 방사성 물질의 누출로 심각한 피해를 일으켰다. 비상상황에서 자동으로 멈추는 긴급운전정지 시스템은 물론 원자로 주변을 감싸는 방호설비조차 없었다고 하니 체르노빌은 원전이 인류에게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선험적으로 보여줬다 할 것이다.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체르노빌 지역은 생명이 움트지 못하는 폐허로 존재하고 후유증 아닌 후유증이 수십 년 더 이어질 것이라고 하니 지나치게 값비싼 원전의 대가가 아닌가.

전 세계인이 동영상 생중계를 통해 목도한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또 어떤가. 지진에 잇단 거대한 해일이 후쿠시마 해안지역을 덮치는 장면은 웬만한 사람들 뇌리에 박혀있을 듯하다. 후쿠시마 원전은 결국 전력과 냉각기능을 상실한 뒤 1호기, 3호기, 4호기가 연이어 폭발하고 말았다.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돼 생명의 땅이 순식간에 ‘죽음의 땅’이 돼버린 것은 불문가지,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아연실색했다. 뉴욕 맨해튼 대형빌딩에 처박히는 비행기와 와르르 무너지는 건물, 방파제를 넘어 도로와 건물 등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거대한 쓰나미의 공포. 구일일, 삼일일은 그렇듯 생생한 영상으로 기억된다.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순전히 인재였다면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자연재해에 따른 인재라고 할 만하다. 한국원자력학회 산하 후쿠시마위원회가 작성한 원전사고 분석 최종보고서는 여러 모로 시사적이다. 해일이라는 극한의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첫 원전사고, 3기의 원자로에서 동시에 발발한 중대사고, 체르노빌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유출된 대규모 오염사고 등을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특징으로 꼽았다. 사고의 근본원인과 사태확산을 분리해 다룰 수는 있겠지만 자연재해와 인재를 분리할 수는 없다.

경주, 포항지역 지진과 원전시설을 두고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원전 덕분에 우리나라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하고, 원전을 통해 값싼 전력을 얻기는 하지만 그 폐해와 향후 치를 대가는 결코 값싸지 않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문제는 경제적 효율이 아니라 국민의 안전이다.

원전 에너지의 가치를 두고 왈가왈부할 수는 있어도 국민의 안전문제를 두고 흥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활성단층이 보고된 지점이 경주, 울산, 포항 지역에 밀집해있다는 사실과 그곳에 원자력발전소와 방사능물질폐기장이 집중해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포항 지진에 따른 정부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연기 발표는 타당성을 띤다.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수능, 그렇기에 미래를 걸고 수능을 준비해온 전국 수십만 명의 수험생이 겪을 충격과 혼란이 적잖을 것이다. 수능에 맞춰 휴가를 나온 군인도 있다하니 그 불평이 오죽하겠는가.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계획에서 어긋나면 누군들 불편하지 않겠는가.

일주일을 더 견뎌야하는 수고로움이 자못 크다. 그럼에도 수능 하루 전에 지진이 일어났고 그 지진으로 인해 국민과 수험생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면 어찌하겠는가, 지진의 직접 피해지역 수험생들의 불리함은 또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까, 좌고우면하지 않고 신속히 수능 연기를 발표한 정부당국의 처사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지진으로 인한 수능 연기. 이 사상초유의 일은 한국사회의 몇 가지 충격파로 다가온다. 지진, 원전, 수능의 절묘한 가치사슬에 주목할 만하다. 설마 하루 전날 수능을 연기하겠어, 반신반의하던 이들이 많았다. 원전과 수능이 효율과 다수의 이익을 상징한다면, 최근 일련의 움직임은 그 효율과 다수의 이익을 우선에 두는 가치관이 주류였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효율과 함께 국민안전을 가치판단기준에 두게 됐고, 다수의 이익만큼 소수의 불이익과 불편도 챙기려는 사회로 변모해간다고 볼 수 있겠다. 약자이자 변방에 선 농업인에 대한 배려가 보편성을 띠는 사회. 일말의 기대감이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