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이 시작되는 봄철 지독한 가뭄으로 고생하더니 장마랍시고 빗방울은 흘낏거리다 창밖으로 사라져 큰일이구나 걱정했더니 웬걸, 그나마 물 길어 나르며 고생해서 키워놓았던 고추랑 토마토, 가지 등을 돌볼 새도 없이 비가 2주가량 퍼 부니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농약 안 치고 화학비료 안 주고 고추를 키우는 일은 관행농법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기는 게 보통의 생각입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동해에서는 농약분무기 20리터 한 통에 매실액 100미리리터와 사과식초 100미리리터를 섞어 비온 다음 날 고추에 살포해주면 탄저나 기타 해충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벌레를 잡거나 탄저가 전혀 안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겉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였으니 이 방법이 농약도 비료도 없이 고추를 짓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데는 저로서는 추호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5년 동안 고추재배하면서 이 방법으로 자가소비 정도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확했었는데 올해는 겨우 한 근이나 건질는지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오락가락 내리는 비로 인해 밭을 나가질 못하다 비가 뜸할 때 나가보니 고추줄기마다 노린재가 새끼부터 성충까지 고추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라붙어 있어 이건 징그럽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습니다.

사실 고추에 노린재가 달라붙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습니다. 동해에서 지난 5년간 고추 기르면서 진딧물은 봤지만 노린재가 고추에 붙는 경우는 처음이라 뭘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결국 인터넷을 뒤져 뭔가 방제할 방법을 찾아보긴 했지만 정보를 제공해주는 이들도 확신이 없이 그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하는 정도니 답답한 마음에 속만 끓일 뿐입니다.

진딧물에 효과가 있던 주방세제를 물에 타 뿌려주는 방법이 그나마 제일 친환경적이고 효과가 있을 것 같아 거의 매일 아침마다 뿌려주긴 했습니다만 그저 그 때만 잠시 사라질 뿐이고 다음날 보면 더 많은 노린재들이 극성을 부리니 대책이 없습니다. 그나마 탄저라도 걸리지 않도록 열심히 매실액+식초액 희석한 것을 살포했지만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올 고추농사는 헛심만 쓴 실패작입니다.

비가 그치는 틈을 이용해 분무기통 짊어지고 끙끙거렸던 모든 노력은 여기저기 열매마다 탄저가 오면서 순식간에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농약 없이 고추농사 짓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입구 밭 고추는 노린재도 탄저도 없이 잘 크고 있어 한 수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쉴 새 없이 약을 친 덕분이라고 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늦장마에 노린재의 공격에 탄저까지, 고추가 그래도 살아가지고 꽃을 피우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돕니다.

고랑에는 제멋대로 자란 풀이 거의 제 키만큼 올라와 고춧대를 뽑아내기조차 버겁습니다. 대파도 고추이랑과 나란히 심고, 벌레가 덜 덤벼들라고 자소엽까지 심어놓았건만 이놈들이 제 소임은 잊어버렸는지 대파는 풀숲에 묻혀버리고 자소엽은 제 혼자 무성하게 자라 풀과 경합하고 있으니 농사는 제 뜻과는 다르게 되는 게 다반사인 것 같습니다.

그나마 고추는 지지대 박고 줄매주고 추비도 주는 등 정성을 꽤나 기울인 건 워낙 기르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아 사서 먹기에는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긴 가뭄과 늦장마에 다른 작물들은 돌볼 시간도 여유도 없어 방치했더니 결국 밭 꼬락서니가 말이 아닙니다. 아마 밭을 빌려준 주인이 봤으면 도로 돌려달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도라지씨앗을 파종했던 부분은 이미 온갖 잡풀들로 거의 정글 형태가 돼버려 과연 그 밑에서 도라지가 살아남았는지 풀을 베 봐야 알 수 있을 정도가 됐습니다. 낫 한 자루 들고 대략 2백여 평이 넘는 풀밭을 베야 되니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집사람은 예초기라도 사자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맞질 않는 것 같아 망설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힘은 떨어지고 낫질도 힘드니 눈 딱 감고 구입할까 하다가도 그냥 오늘도 낫 챙겨들고 풀밭과 맞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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