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끝에 장마가 시작됐지만 장마라고 뉴스에서 얘기하니 그런가 보다 할 정도로 비는 오는 둥 마는 둥 지루하게 지나가더니 그만 밭만 순식간에 잡초들 세상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찔끔거리는 비로 인해 밭에 나가 일할 타이밍을 놓쳐버려 밭주인에게 미안할 정도로 밭 전체가 정글이 되니 그만 들깨 모종을 심을 의욕마저 잃게 됐습니다.

장마가 끝나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헉헉거리는 무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러니 더더욱 일할 시간도 부족해 겨우 새벽녘에 나가 어느 한 귀퉁이만 풀 베다가 해가 떠오르면 일단은 철수합니다. 나이도 들어가지만 온열병에 걸릴 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것도 모른 채 풀베기에 열중하다 심장이 벌렁거리며 숨이 찬 증상을 경험한 뒤로는 일단 해가비치면 하던 일도 중단하고 집으로 철수합니다. 괜한 욕심으로 몸이라도 상하면 모든 게 도루아미타불이 될 테니까요.

틈틈이 심어놓았던 오이와 고추, 그리고 토마토와 참외밭 주변 풀을 베어 내지만 삼사일 후에 돌아보면 언제 풀을 벴는지 모를 정도로 다시 무성해지는 통에 더 힘이 빠집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어 어쨌든 돌아가면서 풀베기를 하지만 결국 온몸이 땀에 절어 일어서도 했는지 안 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돕니다. 그래도 이런 와중에도 오이와 참외는 뜨거운 날씨 덕분인지 잘도 자라 작은 위안이 되긴 했습니다.

태풍 노루가 일본으로 빠져나갔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동해안은 그 영향권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장대비가 퍼붓고 호우주의보까지 내렸습니다. 이사 온 집은 보일러실과 작은 창고, 그리고 전실을 본채에 덧붙여 지어 바닥부분 방수가 완전치 못했던 모양입니다. 이사 오면서 살펴본다고는 봤지만 바닥시멘트부분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건 순전히 제 탓입니다. 그냥 방수시멘트가 낡아 떨어진 모양이라고 넘어간 게 문제의 발단이었던 거지요.

여름휴가를 내고 집에 온 둘째아이와 저녁외식을 마친 시간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종당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식당 인근 전신주가 벼락을 맞았는지 쾅하는 소리와 함께 식당도 전기가 나가니 모든 게 스톱입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비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아 그냥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바다를 끼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야 5km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와이퍼를 최대속도로 움직여도 바깥이 제대로 보이질 않을 정도로 비가 퍼 부니 그 길이 그냥 천리 길인 양 멀기만 합니다.

거의 기다시피 집에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보일러실로 물이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변이란 말입니까. 부실하게 버티던 방수시멘트가 호우에 떨어져나가면서 그사이로 빗물이 스며들기 시작한 겁니다.

세숫대야와 바가지, 철제 컵, 걸레 등을 동원해 고이는 물을 퍼내다보니 한밤중입니다. 비가 멎어서야 퍼내는 일도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물난리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다행히 날이 개고 집사람도 아이도 서울 병원에 일이 있어 상경하고 난 다음 며칠 후 다시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보일러실도 다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집사람이 같이 있은 들 뭐 차이가 있겠습니까만 혼자서 걸레로 짜고 바가지로 퍼내자니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거의 5분에 한 번씩 대야에 가득한 물을 밖으로 내다 버리다보니 대문사이로 흙탕물이 넘실대는 게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놀라 우산도 없이 나가보니 대문 앞 도로로 개울물이 역류하면서 자동차가 잠길 위험에 처한 겁니다. 일단 급한 대로 자동차를 빼 지대가 높은 마을회관 주차장으로 차를 옮기고는 개울로 가보니 이미 마을 반대편은 황토물이 제방을 넘고 있고, 조만간 마을 쪽도 물이 넘칠 기셉니다.

마을사람들도 전부 밖으로 나와 걱정스럽게 개천을 바라보니 귀중품 몇 가지라도 챙겨 대피해야 어쩌나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비가 잦아들면서 도로에 넘쳤던 물도 개울물도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살집을 결정하는 일은 이처럼 여러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봐서 결정해야 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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