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그 마을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면 꽤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좌우는 물론 전후까지 거의 지붕이 맞닿을 정도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어 모든 움직임에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마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행이라면 대문 앞은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폭이 넓은 도로로서 멀리 건너편 집을 제외하고는 신경 쓸 일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유명관광지가 가깝기도 하지만 원래 이 마을은 30여 년 전 폐쇄된 탄광촌 마을이었던 탓에 농사짓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은 곳입니다.

하천부지와 철도부지가 혼재된 마을에 저처럼 땅과 집을 등기해서 소유하고 있는 이가 드물어 행동거지는 물론 TV소리까지도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됩니다. 주민들이 거주하는 주택은 대부분 지상권주택이지만 그로 인한 불편함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단지 주택신축이나 개축이 어려워 집들이 낡고 쇠락해 마을 전체가 움직임이 없는 정물화에 갇힌 느낌입니다.

집 베란다 앞 작은 정원과 담 없이 맞닿아 있는 지붕 낮은 집은 제게 밭을 임대해준 이가 살고 있는 주택입니다. 처음에는 코앞에 남의 집 지붕이 눈높이로 다가와 시각적으로 불편하더니 지금은 오히려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같다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먼저 살던 곳에서는 쉬엄쉬엄 혼자 사람이 끄는 쟁기로 밭을 갈았지만 이곳은 그렇게 하기에는 밭이 넓어 보여 밭주인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마을 돈으로 구입한 트랙터를 이장이 관리한다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줬습니다. 농사짓는 이도 많지 않은 마을에 웬 마을 트랙터인가 의아해 했지만 어쨌든 남쪽방향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귀나무골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이장을 찾아갔습니다. 부탁하는 입장이니 시내마트에서 구입한 딸기 한 상자를 건네면서 잘 처리해 달라고 인사하고 수고비 얘기를 했더니 로터리치고 나서 말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언제 해주겠다는 언질도 없이 마냥 기다리다 재촉하기도 뭐해 에이 내가 보구레 갖고 밭을 갈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삿날이 임박한 어느 날 밭에 나갔더니 아주 잘게 골고루 밭을 잘 갈아놓은 게 아니겠습니까. 거참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내 수고를 덜게 됐으니 고마운 일입니다. 수고비를 지불하려고 몇 차례 전화하고 문자도 보냈지만 이상하게 그 이후로는 연락이 되질 않아 괜히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갑자기 열린 수돗물 공급관련 마을회의에서 이장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규모 공해가 발생하는 시멘트공장이나 화력발전소 인근 마을에는 마을단위로 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자금이 지원되는데 이게 마을에 사달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합니다. 농사가 주업이 아니고, 그렇다고 어촌마을도 아닌 이 마을에 인근 화력발전소에서 매년 지원되는 자금이 어떻게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다가 이장이 트랙터를 구입하면서 문제가 들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트랙터구입비도 몇 천 만원씩 할뿐더러 매년 보험료도 지불해야 되는데 마을사람들과 의논도 없이 이장 단독으로 일을 벌였고, 더욱이 매달 걷는 수돗물 대금 5천원에 대해서도 증빙서류 없이 돈을 다 썼다고 하니 마을이 발칵 뒤집힌 건 당연할 일이었을 겁니다. 몇몇 마을사람이 경찰에 횡령죄로 이장을 고소하고 관할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에서는 이장에 대한 직무정지 조치를 내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장을 다시 뽑는 선거를 실시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재선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러니 이 마을은 이장이 없는 마을이 돼 각종 공지사항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주민들만 불편하게 됐습니다.

소위 마을발전기금이란 자금이 어떻게 이장이 단독으로 집행할 수 있는지, 또 그 사실도 나중에야 알려지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행정기관은 몇 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 이장 개인이 처리되도록 방치한 책임이 있을 텐데 그냥 강 건너 불보기니 아직 이 사회가 투명사회가 되기에는 먼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 이장이라는 직책이 이처럼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니 이장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지역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어야 되는 입장인지라 그저 입 꾹 다물고 모든 사안이 정상적으로 처리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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