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과 물난리, 온갖 풍상을 이겨낸 벼가 논에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재고미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데 또다시 추수기가 코앞이다. 농업인은 수확이 마냥 기쁠 수가 없다. 지난해 최악의 쌀값 폭락사태를 겪은 데다 초유의 우선지급금 환수사태까지 농가의 시름은 무척 깊다. 올해 쌀은 얼마나 나올까, 얼마나 남을까, 쌀금은 어떨까 걱정이 태산이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좀 나아질까, 그 밥에 그 나물일까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다.

우리 쌀 산업은 총체적 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물 세 해 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직후 김영삼 정부는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만은 지키겠다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도하개발의제(DDA) 출현과 동시에 농업보조금 축소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노무현 정부는 2005년 추곡수매제도를 폐지하고 공공비축제도를 도입했다.

도하개발의제는 협상기간 16년을 넘기면서도 완전타결에 실패하고 부분타결에 만족할 뿐이다. 일각에선 도하개발의제의 종말선언을 주문한다. 그 사이 농업보조총액 등 세계무역기구의 ‘올가미’에 발목 잡힌 한국농업은 쇠잔해졌다.

근시안은 위험하다. 쌀 생산을 줄이겠다며 무턱대고 논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논을 놀리거나 다른 작물을 심어서라도 생산기반은 유지해야 한다. 언제든 닥쳐올 식량대란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생산기반 붕괴만은 막아야 한다. 명분에 부합한 실리도 마련돼야 한다. 쌀값 하락만큼의 소득보전책이 없다면 벼 재배면적과 쌀 생산량이 급감할 수 있다. 쌀 생산조정제도를 도입하되 농가소득을 보전하는 방안이 병행되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예산을 핑계로 쌀 생산조정제도에 관해 난색을 보이는 재정당국의 행태는 근시안적인 데다 고의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이른바 자동시장격리제도가 한 방편으로 대두했다. 수확기 이전에 적정 생산량과 소비량을 책정하고 이에 맞게 초과물량을 자동으로 시장에서 격리하는 제도다. 쌀값 안정과 수급조절 면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시장개입에 따른 부작용과 예산수반 등 요목조목 따져볼 일이나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재고와 시장격리 물량의 처분이다. 대내외 여건이 마뜩찮지만 강단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 농정의 성패여부는 쌀 대책에서 판가름할 것은 자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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