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하다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 년 내내 집과 밭 사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추석이나 설같이 특별한 명절이나 돼야 힘겹게 며칠간의 외박을 단행하지만, 바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건 괜한 걱정 때문입니다.

가을에는 산짐승들이 밭을 망치지나 않을까라는 걱정, 겨울에는 수도 동파나 보일러 동파를 걱정하지만 실상 보름정도 집을 비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걱정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한시라도 곁에서 떼어낼 수 없는 숙명의 등짐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득이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면 걱정을 짊어지고 나가야 되니 가능하면 집을 비우지 않으려 애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고 낯선 곳에 대한 여행이 마음을 설레게 하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마음입니다.

년 초부터 계획을 잡고 추진했던 생활협동조합 활동의 일환인 제주도 감귤농장 일손돕기 및 자주점검 일정이 확정돼 마침내 코앞에 닥치게 된 겁니다. 년 초에야 11월 중 행사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과 그 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무심했었는데 비행기티켓 예약을 위해 돈을 입금시켜야 된다고 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입니다. 지금 와서 못 가겠다고 뒤로 빠질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마음이 급해집니다. 집사람과 그동안 미뤄뒀던 이런저런 일들을 서둘러 마치고 짐을 꾸려 미리 서울 딸네 집으로 올라왔습니다.

다른 일행들이 공항까지 오는 버스가 많지 않은 시골에서 출발해야 돼서 제주행 출발시간도 오후 늦게 잡혔고,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습니다. 생협에 감귤을 대량 공급하는 농업법인에서 제공한 숙소는 보일러 고장으로 을씨년스럽고 추웠지만 모두들 들뜬 마음이 가득했던지라 별다른 불평은 없었습니다.

새벽녘 강한 바람 탓인지 얇은 가을 점퍼로는 추위를 막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래도 어스름 새벽빛에 주위 감귤 밭이 보이기 시작해 무작정 산책길에 나섰었습니다.
무채색 하늘과 대비되는 주홍빛 감귤은 마치 수천수만 개 등불처럼 어둠 속에 빛을 발하면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과연 제주에서 감귤은 주홍빛 보석이라 부를 만합니다.

숙소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일손 돕기를 나서야 돼서 서둘러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총 9명이 감귤수확 팀과 선별 박스작업 팀으로 나눠 작업을 돕기로 결정돼서 저는 다른 2명과 함께 박스작업팀에 합류해서 일손을 돕기로 했습니다.

농촌에서 일손부족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만 ‘큰수풀공동체’라는 작목반도 예외가 아니어서 연로하신 어머니들이 감귤을 선별하고, 중장년 남성들이 컨베이어를 통해 박스에 담고 포장하는 작업을 다 해야 된다고 합니다. 물론 기계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저에게 주어진 일이 50개 단위로 묶인 종이상자를 풀어 박스 모양을 만들어 컨베이어에서 쏟아져 내리는 감귤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처음에야 기계에 익숙지 않아 박스 모양이 엉성하게 되기는 했지만 곧 익숙해서인지 제법 반듯하게 접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공장형 건물은 천정이 높고 난방도 없어서인지 몇 시간이나 큰 움직임 없이 작업을 하다 보니 한기가 스며듭니다. 박스에 스티커를 붙이는 일을 하는 다른 이들과 일을 바꿔 하기도 하고 컨테이너에 싣도록 박스를 비닐 랩핑하는 일도 하면서 귤 한 상자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고가 스며들었는가를 새삼 느껴봅니다.

하루에 2천 상자를 출하시키는 일을 할머니 두 분과 장년 남성 셋이 해야 하는 현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국인 노동자를 쓰는 일도 여러 문제로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늦은 점심은 외부 식당에서 배달 온 음식을 함께 나누고 일을 마치니 시간이 남은 탓에 감귤 수확작업을 하는 팀으로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귀농을 했다는 부부가 친환경으로 재배하는 감귤농장에서의 작업은 해가 질 무렵에야 끝이 났고 모두들 만족스런 얼굴로 멀리서부터 온 보람을 만끽했던 일손 돕기 행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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