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과에 속하는 식물은 약 1억 4,000만 년 전에 처음 등장하였다가 오랜 세월을 거쳐 겨우 야생종 벼로 진화하였다. 현재 사람들이 먹는 쌀은 대략 1만 5천 년 전경에 원시인들이 야생종 벼를 찾아 식용한 것이 시초일 것이라 추정된다.

야생종 쌀이 재배종으로 바뀌는 시기는 대략 8천 년 전, 인디카와 자포니카로 나뉜 시기는 3천 9백 년 전으로 추정된다. 세계 3대 식량작물은 보통 쌀, 밀, 옥수수를 이야기 하는데, 영양, 수량, 지역 적응성 등이 여타 작물에 비해 뛰어난 작물들이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벗어나게 되는 1950년대 후반까지는 우리 민족이나 농업 모두 힘들었던 시기이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가까스로 지킨 벼를 기반으로 육종을 시작해 점차 일본품종을 대체하는 우수한 우리 품종을 육성·보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외 상황, 전문 연구역량의 성숙,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뒷받침, 그리고 지도자의 강한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물로 통일벼가 탄생하였다.

인디카의 피를 받은 통일형 쌀들은 태생부터 무리수를 안고 나왔으나 실보다 득이 많다는 이유로 보급되었던 미완의 작물이었다. 후속 연구와 품종을 통해 계속 보완해 나갔으나 식량자급을 달성한 이후에는 쌀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재배면적이 급감하였다.

통일형 벼는 발상의 전환으로 당시의 불문율이라 생각되었던 모든 것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게 한 소위 패러다임 시프트의 아이콘이었다. 또한 우리 농업의 밑거름으로 통일형 벼 육종에서 보급까지 모든 자원과 모든 역량을 모아 진행한 범국가적인 프로젝트였기에 관련 분야의 성장을 이끌었다.

통일형 벼로 인해 저렴한 가격으로 쌀이 공급됨에 따라 사회 다른 분야의 발전여력이 확보되고, 사회현상도 변화되었다. 통일형 벼 재배를 독려하고 농업인들에게 장려하기 위해 동원된 많은 정책들은 현재 시행되는 농업 정책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통일형 벼는 타산지석으로 잊지 않아야 할 교훈을 주었으며, 미래농업의 씨앗이 되었고 국위선양에 기여했다.

농업이 1차 산업으로 분류되는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간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지혜가 필수 이며 과거 통일형 벼의 성공이 무엇 때문인지를 안다면 지금 농업농촌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해법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년전부터 아시아의 대표작물

벼과에 속하는 식물은 약 1억 4,000만 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가 오랜 세월을 거쳐 겨우 야생종 벼로 진화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약 23종의 벼 속(屬)식물이 벼과 식물에서 분화되어 식량이 될 수 있는 야생 벼로 발전된 시기는 대략 2~3백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벼과 식물(화본과)은 보리, 밀, 옥수수 등 현재 주요 식량작물이 모두 포함되고, 보리, 밀, 옥수수, 호밀, 귀리 등의 곡식류들은 모두 1억 4천만년경에 태어난 식물이 공통조상으로 후에 각자 진화한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의 유물은 우리나라의 소로리 볍씨로 탄소동위원소 측정결과 1만 5천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됐다.

벼는 1,000년 전 아시아인의 대표적인 식량작물로 등극했고, 벼가 자리 잡은 지역은 기후영향도 크지만 식물의 특성상 노동력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지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야생 벼를 재배화하기 시작 했으며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식량으로 자리매김했고,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굴된 ‘가와지 볍씨’는 야생 및 유사종 볍씨가 농기구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약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쟁 후 통일형 벼로 식량난 해소

쌀은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칼로리가 높은 에너지원으로 단백질 함량도 높으나 비타민과 무기질은 반찬으로 보충해야 한다. 특히 쌀 재배지가 최고의 인구부양력을 갖는 이유는 연작과 이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인데, 이를 감안하면 밀 인구부양력의 3배에 달한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벗어나게 된 1950년대 후반까지는 우리 민족이나 농업 모두 힘들었던 시기로, 쌀 육종을 주도하던 일본인 학자들이 귀국하면서 주요 기자재, 종자 등을 모두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후 1950~1953년까지 전쟁의 참화에 휩쓸려 육종은 커녕 남아 있던 종자조차 거의 피난민에 의해 식량으로 사용됐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통일벼는 국내외 상황, 전문 연구역량의 성숙,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뒷받침, 그리고 지도자의 강한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특히 필리핀 소재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우리 육종인력의 훈련과 다수성 쌀 육종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통일형 벼의 육종연구 필요한 때

통일형 벼는 육종에서 보급까지 모든 자원과 모든 역량을 모아 진행한 범국가적인 프로젝트였기에 관련 분야의 성장을 이끌었다.

냉해에 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보온못자리, 비닐하우스, 모판 등의 기술은 추후 벼 안정생산의 필수기술로 자리매김했다. 또 채소분야와 함께 백색혁명을 이끈 비닐하우스 농법과 육종체계및 지역적응 등에 대한 노하우도 중요한 자산이다.

통일형 벼로 인해 저렴한 가격으로 쌀이 공급됨에 따라 사회의 다른 분야의 발전여력이 확보되고, 사회현상도 변화했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쌀을 공급함으로서 가계에 여유를 주고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신뢰를 높인 효과도 발생했다.
아울러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통일형벼 육종의 유산들은 한 몫을 할 전망이다.

식량 확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민의 생존이 위태롭고 생산 활동 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만큼 농업을 통한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또 농업을 식량생산업이 아닌 진정한 산업으로, 농업인을 노동자가 아닌 경영자나 산업인력으로 보고 전략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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