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어여삐 여긴 비극의 주인공 햄릿이 읊조렸다. 세기의 문호 셰익스피어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널리 알려졌을 연극대사다. 아니, 셰익스피어는 몰라도 웬만한 이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말을 알 것이다. 살면서 죽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수없이 반복하는 독백일 터.

필자만의 사유방식인지 모르겠으나 죽느냐 사느냐와 함께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이 바로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말이다. 달걀이 있어야 병아리가 나온다, 닭이 있어야 달걀을 낳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끝없이 이어진다. 그 희극의 주인공 달걀과 닭이 요즘 조류 인플루엔자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인 양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섰다. 정확히는 닭과 달걀의 문제가 아니라 양계농가의 생사가 걸린 문제일 것이다.

닭과 달걀 논쟁은 시발점을 두고 벌이는 비과학적 언어유희에 가깝다.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탄생을 두고도 창조론자가 아닌 바에야 대개가 천체물리학이니 생물진화론이니 하는 과학에 기대기 십상이다. 과학적인 입증이나 발견이야 그들 몫이긴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 논쟁을 되풀이하고 있다. 순서를 정하고, 앞뒤를 다투고, 인과관계를 찾고, 더 나은 시작과 끝을 위해서라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사다.

그것이다, 시작과 끝. 시작이 끝인 듯, 끝이 시작인 듯 끝과 시작은 자웅동체마냥 한 몸이 아닌가. 우리는 인생에서, 일상에서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을 종종 하지 않든가. 하물며 윤회사상은 우주와 생명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아주 오래된 신념체계를 잉태해왔다. 이 철학을 수용할 경우 죽느냐 사느냐라는 햄릿의 고민은 그저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가 될 뿐이다.

그럼에도 시작은 시작이요 끝은 끝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듯이. 연말연시가 그렇다. 한 해가 끝나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한다. 끝이 있고 시작이 있으며, 시작이후 끝이 온다. 사실 하루든 한 해이든 인간의 시간은 모두 지구와 태양의 관계를, 온전한 실체를 알지 못하는 우주세계를 인간의 언어로 나눈 것일 뿐이다. 지구가 스스로 돌며 낮과 밤이라는 옷을 번갈아 입는 일이 하루요, 지구가 태양의 인력으로 머나먼 허공을 한 바퀴 도는 일이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억겁은 그렇게 우주의 시작과 끝에 의존하고 있다.

송구영신.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해피 뉴 이어라는 영어에 밀려나기는 했으나 연말연시 덕담이자 인사말이기도 하다. 저물녘 상념에 젖다 보면 온갖 어려움과 기억하기조차 싫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마련이다. 잊을 일은 잊고 보낼 것은 보내고 새로 한 바퀴 돌아보자고 다짐하는 세모.

요즘 송년회나 망년회에서는 무척 민망한 건배사가 유행이라고 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닐 터에 웃고 넘기기에는 씁쓸하다. 병신년, 잘 가라는 말이다. 내년이 정유년이고 올해가 병신년이긴 하다. 그러나 인구에 회자하는 병신년은 중의적이다. 신체 비하에 여성 혐오를 내포한 고약한 말이 돼버리고는 한다. 대통령 탄핵 정국이기에 시국은 요동치고 민심은 흉흉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혼돈의 시간을 도가니에 우겨넣으려는 것만 같아 쓰라리다.

이제 정유년이 시작할 끝에 와있다. 돌이켜보면 정유년은 변혁 또는 변화의 기점이었다. 근래 정유년은 1957년, 1897년이다. 한국전쟁이후 폐허를 딛고 살아남은 이들이 번창의 계기로 삼은 것이 아마도 후세 생산이었을 것이다. 정유년 1957년은 베이비부머 원년이다. 갑오농민전쟁 직후 1897년 정유년도 새로운 기점이다. 갑오세 가보세, 을미적 미적대면, 병신 되어 못 가니.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예언처럼 돼버린 이 선동가에는 정유년이 나오지 않는다. 갑오의 시작이 끝나고 정유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끝도 시작도 의미 없는 연속이지만, 지구가 아픔과 혼란의 주행을 끝내고 다시 태양 주위를 항해할 태세다. 날이 저물고, 한 해가 저물고 잠시 후에 날이 새고, 한 해가 떠오른다. 절망의 벼랑은 끝이자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우리 농업, 한국 사회는 절망의 끝에 섰다. 그곳은 처녀림의 입구일지도 모른다. 희망의 시작에 섰다.

줄탁동시. 줄탁지교, 줄탁동기로도 쓴다. 어미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가 되기까지 대략 21일이 걸린다. 품은 지 열여드레가 지나면 알속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반응을 시작하는데 알속 병아리가 막을 찢으려 쭐쭐대는 것이 줄이요,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깨려 부리로 탁탁치는 것이 탁이다. 의성어 같은 줄과 탁이 맘에 쏙 든다. 안팎이 서로 도와야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어미와 새끼, 스승과 제자, 정부와 농업인, 도시와 농촌, 형제자매 등 모든 관계에 소통과 조화와 협력이 중요함을 일깨운다. 닭과 달걀은 누가 먼저인가라는 시시비비에만 등장하지 않는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자 탄생에 나란히 등장한다. 시작과 끝이 어깨동무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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