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은 제21회 농업인의 날이다. 지난 1996년 첫 기념식이 열리고 20년이 흘렀다. 농업인의 날이 엄연히 대통령령으로 정한 공식기념일임에도 적잖은 국민이 여전히 ‘빼빼로 데이’로만 알고 있다하니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상업성이 짙은 ‘데이 마케팅’ 탓에 농업인이 홀대받는 기분이다. 초콜릿과자의 일종인 빼빼로는 1980년대 중반에 나왔으니 벌써 30년이 넘은 장수제품이다.

 1990년대에 부산 등 영남지역 일부 여고생이 날씬한 다리와 몸매를 유지하자며 친구끼리 선물로 주고받던 일에서 유래했단다. 이 과자를 만드는 L제과의 연고지라고 할 만한 부산이라니 상업적으로 이용했을 개연성이야 충분하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농업인의 날과 빼빼로 데이는 20년간 경쟁하듯 해마다 11월 11일을 맞이했다. 전체 판매량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이날을 기업이 허투루 보낼 수야 없는 일이다. 사운을 걸고 매진했을 터, 이날은 어느덧 젊은이와 아이들이 통과의례처럼 초콜릿과자를 주고받는 ‘그날’로 자리 잡았다. 반면 농업인의 날은 어디 강당에서 높은 양반들 모시고 애국의례로 시작해 포상시상으로 끝내는 ‘체육관 행사’가 돼버렸다. 서글픈 일이다.

정부도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짜냈다. 가래떡 데이다. 아, 얼마나 처절한가, 가래떡처럼 날씬하고 미끈한 다리와 몸매를 위해 맛도 좋고 영양도 좋은 가래떡을 먹는 날이 바로 빼빼로 데이, 그날, 가래떡 데이랍니다! 대견하다. 냉소가 아니다. 밀, 과자 대항마로 쌀, 떡을 제시하고 농업인의 날이라는 점도 부각하려 노력했으니 훌륭하지 않은가. 그러나 딱 거기까지인 듯해 서운하다. 선언으로 그치지 않았나 돌이켜볼 일이다. 그 과자는 해마다 히트상품이 따로 있을 정도로 새삼스러운데 가래떡 제품은 십여 년간 그대로 구태이니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제과회사만큼이나 다양한 신상품을 개발하고,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홍보마케팅을 벌이라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농업인의 날은 말 그대로 농업인의 자존감을 드러내는 날이다. 정부가 가래떡을 수단으로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이것 아닌가. 농업인은 한낱 초콜릿과자만도 못한 취급을 당할 까닭이 없다. 가래떡은 수단일 뿐, 그 재료가 되는 쌀을 생산하고, 과자재료인 밀을 재배하고, 국민의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농업인을, 농업인의 노고를 기리는 날이지 않은가.

차라리 가래떡 데이는 없애고 당초 농업인의 날 행사에 집중하는 것은 어떨까. 가래떡 데이니 뭐니 하는 이런저런 행사에 쓰는 정부예산을 한목에 모아, 정공법으로, 실내가 아닌 광장에서, 농업인의 날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행사 말이다.

수백수천이 먹을 만큼의 밥을 지을 수 있는 초대형 가마솥 몇 개를 걸고, 무청 배추 등속에 된장 풀어 국도 끓이고, 나다니는 어른들 아이들 불러 모아 조촐하게나마 잔치를 벌이는 광경을 그려보자. 따끈한 국물에 쌀밥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치사는 필요 없다. 그 모습 그대로가 농업인의 노고를 알아주는 일이고, 고마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는 날, 이웃을 불러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하는 날, 그간의 노고를 서로 어루만지고 힘내시라 북돋는 날, 그러다 웃고 울고 어우러져 한 가락 뽑고 춤도 추는 날, 세상만사 모두 흥겨운 잔칫날이 바로 농업인의 날이 돼야 할 일이다.

근본 뜻으로 보면 잔칫날이 당연하지만 어느새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농업인의 날은 변질한 것이 사실이다. 가진 것 적어도 풍족하다 여기는 넉넉한 마음, 슬픔도 기쁨도 서로 나누려는 훈훈한 정이 몹시 아쉽다. 농업인들은 수입농산물에 치이고, 농업경시 위정자들에 억눌리고, 소비자 괄시에 떠밀려 생존의 몸짓만으로 버거운데 언감생심 잔치라니, 하는 심정일 것이다.

농업인의 날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농민의 날’ 혹은 ‘권농일’은 봄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6월 14일이 ‘권농일’로 지정됐고, 해방이후 잔재를 없앤다고 6월 15일을 ‘농민의 날’로 바꿔 불렀다. 이후 6월 10일을 ‘권농의 날’로 정했다가, 1973년 ‘어민의 날’, ‘목초의 날’과 통합해 5월 넷째 화요일을 ‘권농의 날’로 지정했다. 그렇게 다시 20여 년이 흘러 대통령령으로 ‘농업인의 날’이 제정되고 1996년 11월 11일 첫 기념식이 열렸다.

농업인의 날 유래를 좇다보면 강원도 원주에 도달한다. 원성군 농촌지도자회와 4-H회 등은 1964년 11월 11일 첫 ‘농민의 날’ 행사를 치렀다. 이들은 해마다 같은 날 행사를 치르는 한편 기념일 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 그래서 원주는 농업인의 날 발상지이며 농촌지도자는 공식기념일 제정의 일등공신으로 통한다. 반세기 전 이들의 철학은 삼토(三土)사상으로 귀결한다. 십일(十, 一)은 합쳐 흙(土)이 된다. 농민은 흙에서 태어나, 흙에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철학적 의미에서, 삼토가 되는 11월 11일 11시에 ‘농민의 날’ 행사를 시작했다.

원주에서는 제53회 농업인의 날 기념행사와 함께 삼토문화제가 열렸다. 대형 가마솥 뚜껑을 여럿이 짊어 열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때 밥 주변에 모여든 시민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 현실이 힘겹고 버거워도 농업인의 날이 잔칫날임을 원주는 일깨워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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