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입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관해 “각종 의혹이 확산되고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 위기를 가중시킬 수 있다”며 말을 꺼냈다. 세간에 떠도는 ‘대통령 퇴임 대비’ 소문은 일축했다. 재단과 관련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누구라도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관한 각종 의혹이 잇달아 불거지고, 그 의혹의 정점에 있다고 알려진 최순실, 차은택 씨의 증인채택 여부를 두고 국정감사마저 파행에 이르게 된 초유의 사태에도 꾹 다물었던 대통령의 입이다.

한참을 침묵하던 대통령이 이제야 입을 뗀 까닭이 궁금하다. 의혹과 소문과 사실이 국회와 증권가와 길거리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는 사이 대통령 지지율은 곤두박질했다.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와 관련해서도 부정입학, 학사개입, 학점비리 등 상상을 초월한 추태의혹이 연이어 터졌다. 비리로 얼룩진 이화여대 총장은 ‘방어막’ 역할이 힘에 부쳤는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부 재벌기업들은 전경련을 통해 갹출하듯 두 재단에 거금을 내놨을 뿐 아니라 여러 교묘한 방식으로 최, 정 모녀를 지원해왔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의혹이 사실로 속속 드러나면서 대통령이 말한 바대로 위기는 가중했다. 특히 몇몇 유력 언론사가 마침 ‘최순실 게이트’라고 이름 붙이자 위기에 봉착한 대통령이 입을 뗀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입에서 뜻밖의 ‘사실’이 튀어나왔다. 대통령 본인이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핵심 두 축’으로 설정해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으며, 관이 주도하기보다는 민간이 앞장서고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전경련에, 혹은 외국순방 때마다 동행한 재계 인사들에게 ‘문화 체육에 대한 투자 확대’를 부탁했고, 기업들이 전경련을 필두로 이에 동의해 준 과정이 ‘재단설립의 경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 자발적으로 설립한 재단’이라고 해명한 것과 배치된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일 텐데, 결과적으로는 청와대 혹은 대통령이 재단설립을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서설이 길다. 우리 농업계와 관련이 없다면 굳이 다룰 필요 없는 사안이다. 애석하게도 농업계는 복잡하게 엮였다. 범정부 차원에서, 그리고 범재계가 두 재단에 협력하고 두 모녀에게 아낌없이 지원을 해왔다는 점에서 농림축산식품부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맥락은 간단치가 않다. 인사청문회나 국정감사 과정에서 지적된 바, 김재수 농식품부장관과 그가 사장으로 있었던 한국농수산식품공사, 승마 특혜지원과 관련한 한국마사회 등은 현재진행형인 각종 의혹 한가운데에 있다.

이는 대통령의 수석비서관회의 발언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통령은 K팝 등의 문화, 수준 높은 보건의료, 쌀 가공식품 및 한식이 삼위일체로 복합된 한국형 개발협력 모델이 ‘코리아 에이드’라고 강변하는 한편 재단들의 사업성과 사례로 ‘한식의 세계화’를 들었다. 프랑스 명문 요리학교로 알려진 ‘에꼴빼랑디’가 한식을 정규과정에 도입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결국 대통령은 ‘재계 주도로 설립된 재단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한식 세계화와 같은 성과를 통해 대한민국의 문화융성을 실현해가고 있는데 왜 의혹을 제기해 기업들의 순수한 참여의지에 찬물을 끼얹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저 근거 없는 한식 세계화의 성공스토리라니, 막대한 혈세를 쏟아 붓고도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은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또 한식을 갖다 붙이고 문화융성이라고 자화자찬이라니. 한식의 세계화는커녕 ‘눈먼 돈의 세계화’라고 불러도 시원찮을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이명박 정부의 한식재단은 4년간 600억 원이 넘는 돈을 썼지만 지금 남은 것은 아무 것은 없지 않은가.

감사원에 따르면 한식 세계화 사업에 4년간 예산 931억 원이 투입됐고, 이 중 이월액 222억7천800만 원, 불용액 81억1천700만 원을 빼면 모두 627억2천200만 원이 집행됐다. 80억 원이 넘는 불용액도 마구잡이로 쓰다 다 못쓰고 남은 것이란 얘기가 돌았다.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씨가 한식 세계화를 명분 삼아 세계를 돌며 ‘한식 파티’를 벌인 것은 지금도 회자되는 일화. 대통령 임기 끝날 무렵인 2011년 11월부터 1년간 뉴욕, 런던, 파리, 마드리드, 브뤼셀, 베이징 등지에서 초호화 파티로 13억 원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지적이다. 김 씨는 세계 주요도시를 돌며 ‘한식 가이드북 출판기념회’를 열고 ‘퓨전한식 홍보행사’ 등을 개최했는데, 소요비용이 적게는 일인당 49만 원, 많게는 474만 원이라는 분석이다. 예컨대 고작 20여 명 모인 파리 출판기념회 다과행사에 1억 원 가까운 예산을 썼다. 부대비용 등을 빼더라도 혈세를 먹어치운 ‘한식 파티’라고 할 만하다.

한식 세계화를 통해 우리 농산물이나 전통음식 소비와 수출의 새 장을 열겠다는 허언이 농업계와 식품업계를 할퀸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도 똑같은 행태가 반복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한식은 어느새 ‘K-Food’로 개명했고 음악, 의료와 함께 삼각편대를 이뤄 세계를 점령해가는 문화융성의 첨병이 될 것이라는 호언으로 허언하고 있는 것이다. 혈세 낭비하고 껍데기뿐인 한식을 또 세계화니 문화융성이니 하는 가면을 씌워 여론을 호도하는 짓이다. 그것도 권력누수가 극심한 임기 말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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