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날씨, 해도 좀 너무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지구 온난화니 기상관측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이니 해도 소나기 한 두 번은 쏟아 주어야 하늘도 면목이 서는 것 일 텐데 처서 지난 지금까지도 그게 없으니 여름을 보내고 있어도 무언가 한 구석 결핍감이 있군요.

하긴 예부터 여름비는 피해가고 겨울눈은 쉬었다 가자는 데가 이 고장이니 이제 와서 기대는 하지 안할랍니다만 오늘 아침은 동쪽하늘에 몇 바탕이나 새빨간 붉새(노을)가 져서 사람 은근히 소나기를 기대하게 해놓고 하루해가 다 가도록 하늘에 해만 쨍쨍하니 입에서 조금 이상한 소리가 나오려는군요. 하지만 하늘 향해 주먹질이야 할 수 있습니까? 그나저나 더위보담도 이 가뭄이 정말 심상찮습니다. 저번에는 밭에 깨 만 터지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제는 깨마져도 하얗게 시들고 억지로 익어서 볼품없이 뙤기만 하고 있군요. 두둑을 만들고 심은 고구마는 순이 빨갛게 타는 중이고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에서 지구 마지막으로 재배되던 그 옥수수마저 영글지 못하고 하얘져 버렸습니다.

콩은 말할 것도 없어요. 논두렁에 심은 논두렁콩만 조금 무성하달뿐이지 밭에 심은 것들은 잎이 하얗게 말라서 지난 2년 동안의 풍작이 올해는 흉작이 될 것 같습니다. 꼬투리가 맺는 7월 달에 댕겅댕겅 물마를 새 없이 비가 와야 콩이 실하다는데 꽃피는 것도 시원찮고 맺은 꼬투리도 그대로입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저 사는 이곳의 밭농사는 반타작이나 될런지요.

날이 이렇게 가물면 새들도 잘 울지 않더군요. 제가 유심하게 살피고 느껴본 것으로는 새도 온도 습도가 적당히 맞아야 잘 지저귀는데 짝짓기 철 때 조금 그러고는 아침저녁에도 새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먹이로 삼는 벌레들이 부족하니 배고파서라고 애써 위안하는 건 네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의 그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기도 합니다. 대신 부엉이란 놈은 밤마다 부엉부엉 울어 싸서 조금 기분이 거시기 합니다. 겨울 화롯가에 둘러앉아 듣는 부엉이 소리는 “양식 없다 부엉” “걱정마라 부엉” 으로 들려서 오히려 정감이 있었지만 가끔씩 우는 솥-탱 솥-탱 이 부엉이 소리와 어울리면 괜스레 마음이 송구해지는군요.

새 마저 울지 않고
나뭇잎도 시들었네

잠 못 이뤄 뒤채는 새하얀 밤이면

   솥 탱 -  솥 탱 -

멀리서
아버지 어머니
한숨만 들려올 뿐           - 가뭄 -
 

농사꾼은 어차피 날씨에 민감한 것이라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풀도 잘 자라지 않는 요즈음, 제발 소나기 한 줄금만 내려 줍소사 비는 마음입니다. 황순원의 그 가슴 떨리는 소나기는 이제는 아닐지라도 저쪽 산골짜기서부터 파도를 몰아오듯 우우거리며, 나뭇잎파리들을 쓸어 넘기며, 쳐 뉘이며, 새까맣게 몰려왔다가 하얗게 사라지는, 그래서 온몸으로 팔 벌리고 맞고만 싶은 그런 소나기, 순식간에 마당에 물방개는 떠다니고 낙숫물소리는 시끄러워 사람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고샅으로 쏟아져 흘러가는 물줄기를 타고 봇도랑의 미꾸리며 붕어들이 마당까지 올라와서 펄떡거리는 그런 소나기, 들판에 매어둔 소를 끄지러 갔다가 코앞에서 번쩍 어이쿠! 천둥번개에 놀라 머릿속 하얘지게 만드는 소나기,

옛날에 겪었던 그런 소나기들은 왜 지금은 오지 않는지요. 저는 소싯적에 참외 수박농사를 몇 해 동안 했어요. 돈 나올 것 없는 여름철에 그런 것들을 조금 하면 동네 사람들이 사주어서 가용이 됐으니까요. 벌써 30년 전이군요. 그때는 농약도 필요 없이 수박 참외는 잘 되었고 이동판매 상인도 없었고 주전부리가 많은 것도 아니었지요. 하지만 단순히 가용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는 ‘원두막이 있는 여름밤’류 의 농촌정서를 이어간 달까 하는 사명감(!) 같은 것으로 농사짓는 때였고 ‘원두막 야영’을 여름을 나는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지요.

그 원두막에서 때때로 겪는 소나기, 당시의 저는 문학청년으로서 황순원의 ‘소나기’를 왜 아니 좋아했겠습니까만 그것보담은 소나기 내리는 원두막에서 자연을 사색하기를 더 즐겼습니다. 제발이지 이 지구가 더 이상 더워지지 않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올 여름을 겪으면서 더욱 절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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