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에 씨앗을 뿌려 모종을 얻고 봄 가뭄 등 기상이변을 이기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던 작물들이 겨우 자리를 잡고 자라기 시작할 때 고라니와 멧돼지의 습격이 시작됩니다.
콩밭은 고라니 등살에 견뎌나지 못하고 고구마나 옥수수 밭은 미처 열매가 익기도 전에 멧돼지의 습격으로 뿌리째 뽑혀 나가니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립니다.

자연보호는 법률로서 규정되어 있습니다만 그게 누굴 위한 법률인지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그저 막연하게 동경하는 자연의 모습만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그 자연 속에서 생업을 영위해 나가는 이들의 여러 여건을 고려치 않는다면 그 법은 마땅히 고쳐져야 할 겁니다.

이미 콩이나 팥같이 고라니가 좋아하는 것들은 아예 심지도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종목을 바꿔도 언제 또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으니 농사를 포기하고 차라리 밭에다 꽃이나 심고 말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고추도 고라니의 피해를 보는 사례가 여기저기 생기니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옆 대추나무 밭은 대략 1천여 평 정도로 산허리와 맞닿은 곳은 물론 밭 전체를 철망으로 둘러치기 위해 밭주인이 오랫동안 고생을 했었습니다. 하루 2교대로 근무하는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작업을 해야 되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망을 치는 경비가 지자체에서 보조된다고 하던데 왜 혼자 그리 애 쓰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인 즉 산허리와 맞닿은 밭의 길이가 규정에 맞질 않아 보조를 받을 수 없어 자재구입부터 설치 작업까지 혼자 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지자체로서도 보조규정을 만들고 그에 따라야 하지만 왠지 명쾌하지만은 않은 건 경직된 규정만 따지고 상황은 무시해버리는 제도의 문제점 때문일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애 써서 만든 철망울타리도 소용이 없는 사건이 발생한 건 얼마 전이었습니다. 밭 전체 절반 정도는 대추나무를 심어놓았고 나머지 절반가량에 콩이며 고추, 오이 등과 고구마를 심어 잘 자라고 있었는데 하루는 주인장이 허탈해 하면서 고구마 밭을 보라고 하더군요. 자색고구마를 좋아해 모종을 인터넷에서 주문해 심을 정도인데 대략 100여 미터 정도에 길게 뻗은 밭은 온통 뽑혀지고 내팽개쳐진 고구마로 엉망이 돼 그야말로 목불인견 상태였습니다. 뽑혀 나간 줄기를 다시 심으면 어느 정도는 살아난다고 하지만 그만 포기하는 게 편할 거라는 주인장의 말이 오늘의 농촌 현실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며칠 전부터 뒷밭 주인장이 심어놓은 마 밭을 파헤치고 심지어 두릅나무 밑동까지 지렁이 사냥을 한 흔적이 마치 참호를 파 놓은 것처럼 만들어 놓더니 기어이 이런 사단이 일어나고 만 겁니다. 한번 시작된 멧돼지의 습격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윗밭과 대추나무 밭이 피해를 보자마자 아래쪽 고구마 밭 일부가 파헤쳐져 버렸고 햇볕이 어지간히 따가운 날 밭 주인장이 멧돼지를 막아보겠다고 고구마 밭 둘레를 기둥을 박고 그물로 둘러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물을 덮어주는 게 편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작업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집사람이 얼음물을 내오는 걸로 대체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한 고생이 전혀 도움이 안 됐다는 사실입니다. 다음날 다른 이랑의 고구마가 파헤쳐져 버리더니 결국 다 파헤쳐져 밭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말았으니 다음 차례는 저와 집사람이 매일 저녁마다 차양막을 덮어주고 아침이면 벗겨주는 제 고구마 밭이라는 건 불문가지지요.

대추밭 주인장은 시청에 자력포획을 하겠다고 신청서를 내 기간이 정해진 합법적 올무인식표를 받았습니다만 올무를 파는 곳이 없으니 이게 또 소용이 없게 될 판입니다. 장날 농기구를 파는 이들에게 부탁을 했다지만 올무 자체가 불법이니 본인이 만드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합법적 올무인식표는 지자체가 발행하지만 올무 자체가 불법이라는 게 상위법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니 이게 대한민국 정책의 민낯입니다. 상시포획을 하게 하던지 정부가 군대라도 동원해 대대적 포획작업을 해서 편하게 농사짓도록 만들어줘야 개돼지 같은 농민들이 밥이라도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