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회색빛이었던 산야가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적막했던 이 산골짜기에도 등산복에 배낭을 짊어진 아줌마부대의 출현이 잦아집니다. 대체로 3명이나 4명이 조를 이뤄 산나물이나 두릅 같은 봄철 나물을 채취하기 위한 행차인데 문제는 이이들이 무차별적으로 나물을 채취해 자칫 봄나물 씨를 말릴 수도 있다는데 있습니다.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 같이 지속적인 관리가 되는 산림은 이런 이들이 무분별하게 산림자원을 채취하지 못하도록 범칙금이나 여타 제재수단을 강제할 수 있지만, 보통 개인이 산주인 산림은 사실 무방비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산양삼이나 기타 취나물 종류를 임야에서 재배하는 이들도 이런 무분별하고 예의도 없는 이들로 인해 상당히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러니 CCTV를 설치하거나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심지어는 산속에서 천막을 치고 숙식을 하면서까지 피해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실상 큰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는 얘깁니다.

제가 농사짓고 있는 밭 주위는 예전부터 현주인장의 선친이 심어놓은 감나무와 두릅, 엄나무들이 꽤 있는 편입니다. 물론 상속으로 나눈 밭처럼 이런 나무들도 각자 주인에게 속하게 돼 각자 알아서 수확을 하게 마련인지라 내 것과 남의 것을 확실히 구분해 아무리 때가 지났다하더라도 남의 것을 따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채취할 시기가 너무 지나가나 싶을 때는 전화를 걸어 때가 됐다고 알려주곤 합니다. 이런 일은 저만 이곳에서 거주하니 외부에 있는 이들은 잊고 있거나 혹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밭은 주인장의 둘째 동생이 상속 받아 그동안 묵밭처럼 방치해 두다가 처남에게 경작하라고 넘기고 나서야 밭 모양새가 갖춰졌지만 워낙 경사가 심해 경운기를 사용할 때도 아주 조심해야만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 정돕니다. 작년에는 기어코 경운기가 넘어져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일으켜 세우는데 한참이나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 워낙 젊은이들이나 중장년층이 없는 동네라 힘을 쓸 사람이 없어 마침 고향집을 다니러 온 젊은 사람과 앞집 할머니 댁 큰아들까지 전화로 호출해 겨우 일으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아래 밭이나 제 밭이나 들어오려면 높은 축대 아래로 흐르는 개울을 건너야 되고 통로는 다리밖에 없습니다. 고라니나 멧돼지처럼 야생동물이야 제가 다니면 길이 되지만 사람은 반드시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들어올 수가 없어 보통은 밭 가장자리를 따라 심어진 엄나무나 두릅, 감나무, 밤나무 등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는 않는 편입니다.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면 한참 위로 올라가 축대를 내려갈 수 있도록 설치된 철제 계단을 통해 얕은 개울을 건너 뒤편으로 접근하는 방법뿐입니다. 사실 뒤편도 거의 70도 경사면이라 올 겨울 제가 나무하러 오르락내리락 하면서도 몹시 힘들어 했던 터라 이곳으로 다른 이들이, 특히 여성이 올라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이다지도 초인적 힘을 발휘하게 하는지 정말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 것은 제가 한참 밭을 정리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뒤쪽이 근질거린다는 느낌이 들어 뒤로 돌아보았더니 제가 아껴놓고 나중에 따려던 두릅 순을 아무 거리낌 없이 따고 있는 여인을 발견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일인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정도로 놀라 말문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갑자기 내 뒤쪽에서 나타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거의 70도 경사면을 기어올라 남의 집 두릅을 따려는 욕심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심지어 밭주인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면 응당 물러나야 함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두릅을 따는 그 여인의 욕심을 뭐라고 표현해야만 옳을까요? 그저 내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가치관이 만연한 우리 사회가 이런 무모한 행동을 부추기지는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저 재수가 없어 걸렸다는 생각으로 꽁무니가 빠져라고 도망치는 여인은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고,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이가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그저 헛헛한 웃음만 나오는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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