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지난 지 일주일, 입춘이 지난 지는 아흐레째입니다. 간밤 빗속에서 마당 앞의 개구리가 요란스레 울어댔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연못에 가서 들여다봤더니 벌써 알을 두 무더기나 낳아 놓았군요. 대체 이 녀석들은 게으름이란 단어는 알지를 못하는가보다고 속으로 혼자 중얼거립니다. 하긴 일 년에 한번, 죽지 않으면 반드시 치러내야 하는 일이라 단 하루인들 허투로 보내버릴 수는 없겠지요.

이에 반해 사람은 백배는 더 산다고 하지만 겨우내 놀기만 했던 버릇이 몸에서 떨어지질 않아 개구리 알을 보며 앞으로 일할 걱정으로 호시절 다가는 구나 싶은 생각만 듭니다. 그렇긴 해도 다져진 땅들을 맘껏 디디며 집도 돌아보고 냇가에도 가보고 아침을 먹고는 밭도 한번 둘러보았습니다. 겨울에 눈 덮인 속에서도 답답하면 방 밖에 나서 이리저리 눈 닿는 대로 마음이 끄는 대로 밭이며 산을 돌아다니긴 했는데 이제 보니 불과 며칠사이라도 세상이 퍽이나 달라 보입니다. 아마도 설 지났다는 그 마음의 새로움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저는 이제 우리 세는 나이로 쉰아홉입니다. 꼭 10년 전 마흔 아홉 일 때엔 어서 한살 더 먹어서 쉰이 되고 싶더니 그때와 마찬가지로 올해는 설을 지내면서 예순이 기다려졌습니다.  나이 먹기를 바라고 늙기를 기다리다니 참 이상하지요? 예순이 되어 본들 지금보다 집안 형편이 좋아질 리 없을 테고 자식들을 성취시키는 일 따위의 대사가 잡혀있는 것도 아니고 농사일에 변화도, 여기저기 바상바상하는 몸이 더 건강해질 일도 없겠지만 예순이 되면 막연하게나마 뭔가 세상이 더 많이 달라 보일 것 같습니다.

그런 조짐은 저의 마음에서 작년 가을쯤부터 조금씩 싹터서 자라기 시작했는데 무슨 종교에 귀의 한 것도 아니요. 어떤 마음공부를 한 것도 아니지만 어느 날 슬그머니, 희미하다가 점점 뚜렷이, 깨달음 같은 것이 저 시커먼 뱃속한군데 자리 잡더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가 그게 무엇인가 하고 드러내서 그려보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술잔깨나 먹느라고 까마득히 잊었더니 어느 날 새벽 귓속을 울리듯이 ‘삼가고 절제하라’ 는 말씀, 아니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무슨 큰 깨달음이나 얻은 듯 기꺼워했었습니다.

신동엽 시인이 쓴 ‘금강’ 이란 장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아 서러운 세상을 살아가리라…” 시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문장하나가 읽은 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조금은 새로운 버전으로 머릿속을 울려서 겨우내 꽤 오랫동안 저의 행동을 가르쳤다는 것, 여기서 독서의 영향이 어떠니 하는 답답한 이야기 따위 하려는 게 아니라 아 나이 탓인가 보다고, 나이 한살 더 먹으려고 그러나 보다고 생각되어서 예순이 기다려진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 마누라님과 아주 가끔씩 사랑싸움하듯 하던 입씨름도 거의 하지 않게 되더군요. 아옹다옹 주고받는 그 한마디, 꼭 해야 직성이 풀리던 그 한마디를 삼가게 되니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일이 없어졌어요. 마음 내키는 대로, 직설적으로, 제 멋대로가 아니라 남의 마음대로, 조금 돌려서, 숨 한번 쉴 참만 참으니 역설적이게도 숨을 몰아쉬며 참아 내야할 그 극단적이 상황이 아예 오지 않더란 것입니다.

이것이 꼭 사람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널리 물결의 파문처럼 퍼져나가서 가령 꽃봉오리가 시방 막 터지고 있는 매화를 볼 때나 냇가에 나가 흐르는 물을 보거나 밭둑에 자라는 풀을 보거나 지난 가을의 콩밭에서 노는 꿩과 보리밭의 고라니를 볼 때도 진득하니 이 생각이, 바다에 갯것을 가서도 이 생각이, 옆집 싸웠다는 이야기에서도 이 생각이, 입춘 첩을 써 붙일 때도, 화장실을 가 앉아 있을 때도 변함없었습니다. 재미없지요?

대저 재미란 무엇인가요? 청춘의 시절에는 마음속에 그리던 여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었을 때 재미있었겠지요. 애를 낳아서 재롱과 크는 모습을 볼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재미있었지요. 욕심껏 일을 해서 살림이 조금 나아졌을 때 재미있었답니다. 그리고 글을 써서 내 생각을 드러내고 조금은 인정을 받았을 때. 하지만 돌이켜보면 모두 다 어떤 욕심 욕망이 그 중심을 꿰어서 엮어낸 것들입니다. 어찌 보면 철저히 이기심에서였지 이타심에서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이글을 쓰면서 책상 위 물 컵에 꽂힌 매화를 보고 있는데요. 매화는 차가운 겨울을 참 굳세게 견뎌서 시방 꽃을 피워냈고 사방 군데 향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삼가고 절제한 다음에야 비로소 내보일 수 있는 너그러움인 듯합니다. 욕심 없이 우리 인간이 무엇을 일궈낼 수 있을까만 사람이 이런 자연이 가진 순환의 질서를 볼 수 있다면 맨 나중에 얻어지는 좋은 것은 아마 너그러움 아닐까 싶어요.

써놓고 아무리 이리보고 저리 봐도 오늘은 참 꼰대 같은 이야기인데 그러나 설을 쇠자마자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 예컨대 북 핵에 이은 로켓 발사니 개성공단 폐쇄니 하는 송구스러운 뉴스를 하루돌이로 지켜보는 입장에서 지극히 걱정스럽고 민망하기만 해서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옛 성인들의 말씀을 더욱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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