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하늘의 조화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한창 물이 필요할 때는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주더니 어렵사리 기나긴 날들을 넘어선 초겨울에 근 20일이 넘도록 하염없이 비가 내리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한여름 장대비 마냥 쏟아 붓는 건 아니지만 안개비처럼 내리다가 이슬비가 됐다가,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추적거리니 한창 말려야 할 곶감은 제풀에 썩어 꼭지가 떨어져 버리니 올해 곶감은 틀려 버렸습니다. 우리야 우리 먹을 것만 준비하면 그만이고 설사 못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상업적으로 곶감을 만들어 내다 팔아야 하는 이들의 가슴은 그야말로 새카맣게 타버릴 게 틀림없습니다. 하기야 건조기 속에 들어가 인공건조를 하면 좀 건지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해서는 상품 가치가 별로라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쪽 지방은 입동을 전후해 곶감용 감을 따 말리는데 올해는 한번 정도 수확하고는 그대로 나무에 매달려 줄곧 비를 맞았으니 감 상태야 보지 않아도 알만 할 겁니다.
그야말로 물에 퉁퉁 불어 이게 감인지 뭔지 형태만 감이지 아무 맛도 나지 않으니 딸 엄두가 안 나는 겁니다. 따봤자 아무 짝에 쓸모없으니 그대로 방치된 감이 멀리서 보기엔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주긴 합니다.

작년 이때쯤이면 온갖 새들이 몰려와 감 맛을 보느라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감을 구경하기 힘들었건만 올해는 새들조차 입질을 하질 않으니 그 맛은 불문가지지요.
초겨울 장마가 감농사만 망친 게 아니라 김장배추와 무도 수확시기를 놓쳐 밭에서 썩어 나가게 만드니 대한민국에서 농사짓는 일은 정말 고난의 연속입니다. 저도 딴에는 시기를 맞춰 심었다고 심은 배추를 포함한 김장 작물들이 초겨울 장마와 그 사이에 갑자기 닥친 한파로 냉해를 입었는지 도무지 자라질 않아 결국 김장은 사서 해야 됐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노릇입니다. 귀촌해서 김장거리마저 시장에서 사서 해야 할 지경이라면 누가 봐도 실패한 귀촌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나마 시기를 놓치지 않고 생협에 주문을 한 덕에 제때 배추와 무, 청갓 등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지요.

문제는 계속되고 있는 비오는 날씨였습니다. 어디서나 흔하디흔한 비닐하우스조차 없는 환경이라 처마 밑 좁은 공간을 활용해 배추를 절이기로 하고 간이욕조를 깨끗이 세척해 절임통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물을 길어 나르려면 빗물이 들어갈 염려가 있는 지라 여름내 밭에 물 주던 호스는 너무 길어 새로 호스를 10미터 정도 구입해서 물을 받았는데 이게 김장을 망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밤새 절인 배추를 씻으려고 배추를 집어 들던 집사람이 코를 찡그리며 소독약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간이상수도 저장탱크에서 약간의 염소소독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심하게 냄새가 나는 일은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몇 번 씻어내면 좀 괜찮아 질까라는 기대로 집사람이 씻고 또 씻어보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양념을 하면 좀 나아질 까 했지만 점점 더 역한 냄새만 심해질 뿐이었습니다. 결국 밤새 절인 배추를 버리고는 집사람이 여기저기 인터넷사이트도 뒤지고 아는 이들에게 손품을 팔아 알아낸 결론은 냄새의 주범이 바로 새로 산 호스라는 겁니다.

식수 전용으로 사용하는 호스가 별도로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배움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인터넷에서도 이런 무지의 소치로 음식을 망친 경험담이 넘치도록 있는 걸 보면 우리만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습니다.

일반 비닐호스로 물을 받으면 소독용 염소가 아무리 소량만 있더라도 바로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이처럼 일을 망치게 만든다는 겁니다. 결국 미리 만들어 놓은 양념이 시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인근 농협하나로마트로 나가 급하게 절인배추를 사다 새벽까지 양념을 버무려야만 했습니다.
초겨울 장마만 없었더라도 이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비닐호스의 부작용을 알게 됐으니 그것만이라도 어디냐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