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겨우 숨이 붙어있던 고구마도 옥수수도 하룻밤 사이 훌쩍 큰 것처럼 느끼는 건 그저 비가 고맙기 때문일 겁니다. 뒷밭을 빌려 주로 고추농사를 짓던 이가 올해는 도라지 씨를 잔뜩 뿌리고 나머지 땅에는 들깨를 심는다고 상당한 면적에다 모종용 씨를 뿌렸습니다만 긴 가뭄에다 산비둘기를 비롯한 날짐승들의 습격으로 예상보다 발아된 모종이 훨씬 적게 나왔습니다. 하기야 바싹 마른 고랑 사이에서 싹을 튼 것만도 정말 감사할 노릇이긴 합니다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까. 싹이 나오기만 해도 좋겠다고 할 때는 그 때고 이놈의 날짐승들을 어찌 해야 할 지 분을 삭이질 못합니다.
들깨 씨는 흙속에서 구별을 할 수 없는데도 이놈의 날짐승들은 잘도 구별해서 먹어치우니 점점 더 농사짓는 원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차양막이나 한냉사 등으로 덮어 씨를 보호해야 하니 얼마나 수확한다고 그것까지 투자해야 하나 쉽게 마음을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이들은 이곳 토박이라 여러 경로를 통해 하우스에서 길러낸 모종을 얻어 제때 아주심기를 하니 저로서야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시일이 좀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들깨심기를 포기할 요량은 아니어서 저도 모종용 씨를 뿌리고는 차양막으로 덮고 그 위에 물을 뿌리는 수고를 감수했더니 그나마 싹을 틔우기는 하더군요. 감사한 노릇이지요. 원래 들깨를 심으려고 비워둔 밭은 작년에 떨어진 씨앗으로 발아된 돌들깨와 자소엽(차조기)이 군데군데 나오더니 시일이 지날수록 그 세력이 왕성해져 밭을 거의 다 차지할 정도가 돼버렸습니다. 이러니 이 지독한 가뭄에도 저리 자라준 돌들깨를 뽑아내고 새 모종을 심기는 어렵게 된 겁니다.
아무리 돌들깨가 수확량이 적다고해도 무정하게 뽑아낼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설사 정상 수확이 안 되더라도 이 가뭄에 저 혼자 이만큼이나 자랐는데 그걸 뽑아 내던진다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니까요.
어쨌든 싹을 튼 모종이 적당하게 자라면 돌들깨 사이사이에 심을 예정이지만 그게 제 뜻대로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매실나무 그늘로 햇볕을 많이 받아야 하는 작물은 심을 수 없는 땅에 팥을 심기로 하고 대략 10여 평 정도에 팥을 파종했습니다. 매실도 지독한 가뭄으로 수확량이 작년의 10%도 되지 않았으니 올 농사는 이래저래 되는 게 없습니다.
열흘정도 지나 팥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팥은 다른 작물들과 달리 떡잎이 나오는 게 아니고 바로 본 잎이 나옵니다. 팥은 그래서 그런지 새들의 공격을 덜 받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침나절 눈부신 연녹색의 팥 싹을 보고 돌아섰건만 식사를 마치고 다시 둘러본 팥 밭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습니다. 마치 일부러 누군가가 팥이 자라는 꼴을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다는 식으로 정확하게 팥이 심어진 곳마다 구멍을 뚫어 팥대를 끊어놓은 겁니다. 참 눈이 뒤집힐 지경입니다.
열흘이나 기다려 새싹을 틔웠는데 도대체 어느 놈이 이 짓을 한 건지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어렵습니다. 일전 까마귀들의 공습으로 엉망이 돼서 그 상처가 이제 아물어가는 판에 애써 심은 팥을 공격당해 모조리 못쓰게 됐으니 범인을 잡아 죽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런다고 망친 팥 농사가 원상 복귀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어떤 종류의 새가 이 짓을 했는지 밝히고 싶지만 그저 바닥을 기는 콩새일 거라고 추측만 할 뿐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에 새소리는 필수지만 그건 야누스의 얼굴이 있음은 간과하고 보는 겁니다. 날짐승을 막기에도 역부족인데 이번에는 고라니의 습격도 빈번해졌습니다. 겨우 살려놓은 고구마 순을 따먹고 이제 막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는 옥수수의 어린 열매를 씹어놓으니 밤을 새워 지킬 수도 없고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촌에서 살려면 감내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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