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얼어붙은 날입니다. 골짜기 맨 끝 성질 고약한 늙은이 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차디찬 공기에 얼어버린 듯 움직임이 없습니다.

늦은 밤까지 부엌난로를 때긴 하지만 새벽에 눈을 뜨면 방안은 등이 서늘할 만큼 춥습니다. 커튼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니 칼날 같은 서리들이 겨울 근위병인양 온 대지를 뒤덮어 그 시퍼런 서슬에 놀라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서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방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장에서 산 누비바지와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갑니다.

앞산도 높고, 뒷산도 높은 골짜기니 해가 떠 있는 시간이 평지보다 짧아 오후 3시가 되면 벌써 뒷산 마루에 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햇살은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니 해가 있는 동안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추워지고 어두워져 밖에서 하는 일이 어려워집니다. 뭐 딱히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괜히 하늘만 쳐다보면서 웬 놈의 해가 이리도 짧누 타박만 늘어놓습니다.

농사철에 몸을 움직이는 건 노동이지만 겨울날 나무 등걸을 톱으로 썰고 도끼로 쪼개는 일은 운동이라고 우기는 제가 집사람은 우습다고 합니다. 하기야 이 추운 겨울날 이 일마저 안하고 있으면 하루 종일 TV채널이나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겁니다. 일전 좋은 이웃의 도움으로 간벌된 소나무 등걸들을 앞마당에 쌓아놓고 부자가 된 양 흐뭇했지만, 이걸 난로 크기에 맞춰 자르고 쪼개는 일은 사실 힘들기 짝이 없는 노동입니다. 집주인이 사용하던 기계톱을 꺼내 깨끗이 닦고 시동을 걸었더니 웬일인지 도무지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아마 한 2년여 사용치 않았더니 내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고치러 나가는 것도 귀찮고 위험스런 물건이기도 해 그만 운동 삼아 톱으로 썰기로 작정해서 이 일이 운동이 된 셈이지요.

베어놓은 지 얼마 안 된 등걸은 무겁기도 하려니와 조직이 치밀해 톱날이 잘 들어가지도 않아 커다란 등걸을 4토막 내는 데 하루 종일 걸리기도 합니다. 옆에서 보면 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만하지만 어쨌든 종일 톱질하다보면 팔뚝도 굵어지고 유산소운동도 되니 생산적이고 운동도 되는 이만한 일도 드물지요.

한참을 톱질하다보면 숨이 차고 손아귀도 아파 하늘을 쳐다보며 숨을 고릅니다. 마당가 큰 감나무에 따지 않고 매달려 있는 감은 얼다녹다를 반복하더니 떨어지지도 않고 쪼그라져 보기가 좋지 않지만 이게 새들의 영역싸움터가 돼 가만히 두고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분명 참새는 아닌데 참새마냥 작은 새들이 무리지어 감나무에 앉기가 무섭게 산비둘기가 쫓아들고 작은 새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날아가 버립니다. 그렇다고 이놈의 비둘기가 대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 골짜기는 유난히 까마귀가 많아 비둘기도 이들 앞에서는 도망가기가 바쁩니다. 톱질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면 온갖 새들이 먹이를 찾아 움직이는 패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렇게 시든 풀밭에 작은 새들 수십 마리가 일제히 앉았다 날았다를 반복하는가하면 이들의 뒤를 쫓는 맹금들도 눈에 띄고, 까마귀는 전신주 꼭대기에 앉아 이들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음식물 찌꺼기를 묻는 밭 가장가리는 까마귀가 즐겨 찾는 먹이 터라 다른 새들은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어쩌다 생선머리나 멸치 몇 마리가 버려지면 어김없이 까마귀들이 날아듭니다. 하기야 밤사이 쥐나 너구리, 족제비 따위도 이 먹이 터를 찾았을 터지만 낮 동안에 이들이 최상위에 있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다행히도 아직 큰 눈이 오지 않아 걱정을 덜고 있습니다만, 눈 예보가 있으면 괜히 긴장이 됩니다. 큰 눈이 내리기 전에 이 등걸들을 죄 자르고 쪼개 벽면 그득 쌓아놓아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집니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일 뿐, 몸은 마음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팔목도 아프고 톱을 쥔 손아귀도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할 정도가 되면 오늘 일과는 끝입니다. 겨울날 짧은 해가 뒷산에서 나목들의 실루엣을 비출 때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무사했음을 감사하면서 옷을 털고 실장갑을 벗으며 방문을 엽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