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올라오는 입구 밤나무 등거리에 매달아 놓은 우편함에 꽂히는 건 거의 카드사 청구서나 관공서 고지서 따위가 대부분입니다. 9월 중순 무렵 한국전력으로부터 날아온 사각 대 봉투에 담긴 우편물로 인해 경관을 바라보는 눈마저 바뀌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봉투를 뜯는 순간 밀양송전탑이나 청도송전탑 건설문제는 그저 시끄럽고 골치 아픈 남의 일이 아니고 이젠 내 눈앞의 심각한 문제가 돼 버렸습니다.

345kV 송전탑이 멀고 가까운 산등성에 11기나 세워져 있고, 그로 인해 주민들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민지원 사업을 실시한다는 것이 한전 공문서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미 설치된 지도 7~8년이 지났고,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없던 곳에 지원 사업을 새삼스럽게 해야 하는 이유는 송전탑이 철거되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8월 국회를 통과한 송변전설비 인근 주민지원사업에 대한 법률도 결국은 앞으로 야기될 더 큰 문제점을 미리 차단하려는 얄팍한 꼼수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송전탑을 입력했더니 그로 인한 문제점을 올린 온갖 정보가 놀라울 정도로 많았습니다.

무심히 바라봤던 먼 산 송전탑이 풍경의 일부가 아닌 삶의 질을 파괴하는 위협적인 괴물로 다가오니 그만 끔찍하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차를 몰고 시내에 나갈 때나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 먼 곳을 향할 때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봤던 능선들에 얼마나 많은 송전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지 정말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대한민국 산하 경치가 좋다는 곳에는 반드시 송전탑이 들어서 있다는 말이 틀린 얘기가 아닙니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수많은 귀농귀촌 희망자들이 송전탑이 없는 곳을 찾아야 한다면 갈 곳이 과연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을 하면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이곳처럼 항만이 있고 공단이 도심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작은 도시는 주거지가 밀집한 시내에도 사정없이 고압송전탑이 지나갑니다. 아마 서울 같은 대도시도 모르긴 몰라도 변두리지역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어쨌든 지원 사업 설명회가 열리고 난해한 계산방식에 의한 지원액 규모와 지원방식을 알려주면서 주민대표를 선출해 해당가구주로부터 지원신청서를 받아 한전에 제출해야 일이 시작된다는군요. 송전탑 날개로부터 직선거리 700미터 이내가 지원대상인데 이 골짜기에 해당되는 이들이 총 12가구입니다. 제가 사는 집은 딱 이 거리규정에 처마 끝이 해당돼 혜택(?)을 받는답니다. 대략 가구당 1년 지원액이 47만원이고, 그중 50%는 매월 부과되는 전기요금에서 년 중 균등한 금액으로 분할 감액하고 나머지는 마을 공동사업계획을 작성해야만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이 설명회의 골자였습니다.

12가구 중 대부분이 80세 언저리를 왔다 갔다 하는 고령자들이어서 그나마 젊고(?)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제가 반강제적으로 주민대표로 이름을 올리게 됐으니 이런 딱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연락처도 모르고 지도검색으로 지번을 살피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높은 골짜기 꼭대기에 거주하는 이들도 있으니 난감할 밖에요. 더더욱 송전탑에 대한 진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부터는 어서 빨리 이곳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한데 주민대표라니 세상살이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차라리 모르고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알고 나니 괜히 지나간 일까지도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올 초 갑작스런 집사람의 암 발병도 송전탑과 인과관계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아직 계약기간이 3년여가 남았지만 집사람과 함께 송전탑이 없을 확률이 높은 아주 북쪽이나 남쪽 끝 지역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마 그런 곳을 찾으려는 노력조차도 전혀 쓸모없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깊은 산골짜기라도 송전탑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 설사 그런 곳이 있다 해도 사람이 살 수가 없을 게 뻔할 겁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힘들더라도 찾아보는 노력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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