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철이 시작되면 밭을 가는 일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 한여름 내내 풀과 씨름하던 밭에는 잡초의 제왕인 바랭이가 마른 줄기를 땅에 박고 있어 밭가는 일을 힘들게 만듭니다. 이럴 때 경운기만큼 유용하게 사용되는 농기계는 없습니다. 다양한 부속기구를 이용해 못하는 일이 없을 정도니 바랭이 따위는 걸림돌이 되질 못합니다.

살고 있는 집에는 아주 오래된 경운기가 있습니다만 이게 사실 시동 걸기가 만만치 않을뿐더러 제멋대로 기어가 들어가는 통에 집주인으로부터 한두 번 배운 솜씨론 영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자니 어느 세월에 끝날지도 모르니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이곳 영동지방에는 소가 끄는 쟁기를 사람이 끌 수 있도록 고안된 ‘보구레’라는 골 파기 쟁기가 있습니다. 앞에 바퀴가 달려 앞사람이 연결된 끈을 어깨에 메고 끌면 뒷사람이 쉽게 밀고 나갈 수 있고, 뒤에서 미는 사람의 힘 조절 여하에 따라 깊게 갈기도 가능할 정돕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사람 힘만으로 밭을 갈 수밖에 없어 작업속도가 느리고 단단해진 땅은 쟁기소리만 요란하고 잘 갈리지가 않습니다.

경운기나 관리기, 예초기, 기계 톱 등은 그 편리함만큼 사람이 다치거나 환경을 오염시킬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경유를 사용하는 경운기는 비탈진 밭에서는 자칫 실수하면 전복될 위험이 높고 기름이 흘러 땅을 오염시키거나 매연도 심해 자연환경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가급적 경운기를 쓰지 않으려는 건 석유를 쓰지 말고 농사를 짓자는 운동에 동참 하자는 생각도 있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구레를 이용해 혼자 힘만으로 밭을 갈아 밭 꼴이 갖춰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뒷밭이나 앞밭을 경작하는 이들은 괜한 짓을 한다며 혀를 차지만 어쩝니까? 평양감사도 제 싫다면 그만이니 뒷담화만 무성하겠지요. 하기야 이집 경운기는 밭 갈 철에는 어차피 그들이 사용하길 원하니 제가 안 쓰면 말은 그리해도 속으로는 좋아라할 게 분명합니다. 괜히 미안하니까 경운기를 돌려주기 전에 제 밭 일부를 로터리 쳐주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고령자들만 남은 농촌에서 인력으로만 농사를 짓는 일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농사규모도 작은데 무작정 기계화를 시킬 수도 없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강소농 육성정책도 관광농원이나 체험학습장 위주로 흘러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평범한 이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이 될 뿐이지요. 사실 트랙터 같은 대형농기계나 파종기 같은 농기계는 필요로 하는 때가 한정적이고 너무 고가라 원가개념으로 볼 때 그 효율성은 별로 높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센터나 농협 등에서 농기계임대사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보유하고 있는 기계가 한정적이라 동시다발로 필요로 하는 농가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옆 밭주인은 2교대로 근무하는 회사에 다니면서 비번 일에는 꼭 밭에 나와 작물을 돌보는 아주 성실한 사람입니다. 이틀에 한 번씩 얼굴을 맞대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관리기 임대신청을 하면 보통 보름 후에나 차례가 돌아오니 정작 꼭 필요로 하는 시기를 놓친다며 차라리 중고기계를 사야 되겠다고 말하더군요. 워낙 이곳 토박이인지라 필요로 하는 정보를 수시로 제공해주는 좋은 이웃인 그가 어느 날 낯빛을 붉히면서 인터넷에서 중고 관리기를 사려다 계약금만 날리는 사기를 당했다며 믿을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직접 눈으로 보고 사왔다는 관리기도 수시로 고장이 나 일하는 시간보다 고치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아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돕니다. 그러니 저처럼 미련스럽게 보구레로 골을 파거나 괭이처럼 굽은 삽으로 잡초를 긁어내는 게 뱃속이 편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세상이 바삐 돌아가는 판에 슬로우 모션으로 살아가려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 따위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낫살이나 든 사람이 제 멋에 겨워 산다는데 달리 할 말은 없는 거지요. 이래서 때론 나이 들어가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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