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의 직장생활은 감색양복에 흰색 와이셔츠와 졸라맨 넥타이로 대변됩니다. 마지막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긴팔 와이셔츠를 입고 벗고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습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필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파트 재활용 의류함에 던져버렸던 셔츠가 당장 필요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한여름 아무 생각 없이 반팔 티셔츠 바람으로 밭일을 나갔다 온갖 벌레들과 풀잎 독으로 팔뚝이 성할 날이 없게 되니 아무리 더워도 농부들이 긴팔 웃옷을 입는 심정을 알게 된 겁니다. 버린 셔츠가 아쉬워도 이미 때는 늦었으니 할 수 없이 지인들에게 입지 않고 장롱에 모셔진 셔츠들을 보내달라는 구원요청을 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긴팔 웃옷을 입고 나가야만 될 때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돕니다. 그래도 모기를 비롯한 온갖 날벌레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니 장갑도 손목까지 올리고 나섭니다만 언제 뭐가 물었는지도 알 수 없는 흔적이 곳곳에 남습니다.

긴 목 장화 속에서 뭔가에 물린 발목 상처는 퉁퉁 부어오르고 손목이나 팔뚝도 심하게 부풀어 오를 뿐만 아니라 팔 전체가 수많은 붉은 두드러기로 번져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가려워 병원신세도 져야 합니다.

미물도 세상의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저 허허 웃으며 넘기기에는 이런저런 힘든 점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살충제를 마구잡이로 뿌릴 수는 없는 일. 조심하는 게 상책이지만 어쩔 수 없을 때는 모기 기피제나 벌레 물려 가려운 데 바르는 물약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기후가 변한다지만 2년 연속으로 물 때문에 고생을 하니 그만 농사짓기가 버거워 집니다. 어쩌다 5분 정도 내린 소나기가 밭을 적시면 부지런히 남은 들깨 모종을 심어보지만 금방 떠오르는 태양은 사정없이 물기를 말려버리고 마니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모종들은 줄기가 마르면서 맥없이 중간이 꺾여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잡초들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매실 수확 때문에 돌보지 않았던 밭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입니다. 바랭이와 쇠비름이 주인인양 쑥쑥 자라고 그 틈새에서 모종들은 눈치를 보며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으니 주인 잘못 만나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호미와 낫, 그리고 벌레방지용 모자까지 쓰고 긴팔셔츠와 장갑을 끼고 나서 고랑에 난 풀들을 뽑고 베고 하지만 돌아보면 뭘 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흔적이 나질 않습니다. 흐르는 땀을 셔츠소매로 닦다보면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그립지만 그것도 하늘의 뜻인지라 제 마음대로 되기가 어렵지요.

한사발의 물로도 모기가 번식할 수 있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바로바로 없애지만 시골집이란 게 도처에 모기 서식처가 있는지라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반바지, 반팔로 나갔다가는 어김없이 모기 밥이 되기 십상입니다. 이곳저곳에서 무성하게 자란 쑥대를 낫으로 베어 말려 놓고 손님이 오면 밤하늘에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모깃불 연기를 안주삼아 소주 한잔 하리라는 바람도 그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합니다. 후끈거리는 더위와 말라가는 샘물로 우리 부부조차 씻을 물이 부족해 아이들도 오지 못하게 하는 판이니 손님이야 더더욱 오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아무리 가물고 덥다하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은 해야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땀에 젖은 셔츠를 갈아입다보면 동생을 비롯한 지인들이 보낸 셔츠도 금방 동이 납니다. 쫄쫄 나오는 샘물로는 세탁기를 돌릴 수 없으니 도리 없이 셔츠와 내의, 양말 등속들을 챙겨 집 앞 시냇가로 나갑니다. 허리까지 차오르던 시냇물도 겨우 무릎에 찰랑거릴 정도지만 어쨌든 발이 물속에 있으니 시원하긴 합니다. 빨래판에 문지르고 헹군 빨래를 세탁기로 탈수시켜 줄에 너니 이게 뭔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것도 시골 사는 재미려니 여겨야지 어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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