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농부가 제일 힘든 일은 심어놓은 작물이 벌레나 병에 의해 맥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겁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집사람이 드나들면서 수확하기 편하도록 보루콜리, 양배추, 가지, 약간의 고추 모종 등을 심고 풀도 수시로 뽑고 퇴비도 넉넉히 주어 기르고 있습니다만 언젠가부터 양배추와 보루콜리에 엄청난 양의 벌레들이 덤벼들어 잎을 갉아 먹는데 감당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돼 버렸습니다. 유럽 귀족가문의 방패에 새긴 문양처럼 멋진 무늬를 등에 두른 이놈들은 수 백 마리가 한꺼번에 달라붙어 아무리 잡아도 좀체 없앨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배추벌레나 고자리는 날지 못하니 눈에 띠면 잡기나 쉽지, 이놈들은 날기까지 하니 잡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가 잡기도 하고 쫓기도 했지만 종당에는 손을 들고야 말았습니다. 열서너 포기쯤 있는 양배추는 온갖 벌레의 먹잇감이 돼 잎은 그물모양으로 그 형체만 남았고, 보루콜리는 겨우 몇 포기정도 수확을 하는데 그쳤으니 이래서야 어디 농사지어 먹겠나하는 생각에 농약을 치는 이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게 됩니다.

하기야 눈에 보이는 벌레가 이 지경이니 보이지 않는 온갖 종류의 질병에 대처할 방법이야 강력한 농약을 치는 게 제일 손쉽기는 할 겁니다. 그러니 친환경인증을 받아 대량으로 작물을 재배해 시장에 내는 이들이 그래서 더더욱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파종부터 수확까지 손쉬운 과정을 마다하고 힘들게 좋은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그 집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 TV에서 우리나라 친환경인증이 얼마나 엉터리로 이뤄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보고는 믿고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은 결국 제 손으로 길러 먹기 전에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그만 한숨만 나옵니다. TV프로그램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전혀 없는 사실을 왜곡해서 한 시간이나 방영하지는 않았겠지요.

짧은 농사경력으로 미뤄 봐도 내 손으로 친환경농작물을 길러내는 일도 수많은 유혹에 부딪치는데 하물며 대량으로 시장에 내는 작물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도 아프면 약 먹고 주사 맞는데 농작물은 안 된다는 것도 형평성에 문제는 있을 것 같습니다만 결국 사람이 먹어야만 하니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산업이 곧 농업이기 때문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거지, 터무니없는 불량식품을 만들어내고서야 어디 깃발이나 펼칠 수 있겠습니까.

토양살충제부터 시작해서 때마다 투여하는 각종 방제약병들이 뒹구는 논밭에서 안전한 먹을거리가 생산되길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친환경이니, 무경운농법이니, 태평농법이니 하면서 게으른 농법만을 주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저 작물들이 자체 면역력을 키울 수 있도록 부지런히 작물을 돌보고 좋은 친환경 퇴비를 시비하는 외는 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토종오이가 끝물인지 잎이 노랗게 시들고 있습니다. 집사람이 퇴비라도 줘 보는 게 어떠냐고 하기에 무성한 풀을 낫으로 베고 호미로 주위를 파 한 움큼 퇴비를 넣었습니다만 과연 효과가 있을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시차를 두고 심은 옥수수도 오랜 가뭄 탓인지 태풍이 몰고 온 장대비에도 영 성장이 더디고, 진딧물을 비롯한 각종 벌레들이 극성을 피우고 있어 열매가 맺기도 전에 시들시들 해 보기에도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영양이 부족해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사실 제때 잡초들을 뽑아주지 못한 저의 게으른 소치가 제일 큰 원인일 겁니다. 주위 분들이 이럴 때 복합비료를 조금만 넣어주면 쑥쑥 자란다며 한마디 합니다. 그러나 차라리 안 먹고 말지 화학비료는 안 주기로 했으니 ‘아 ~ 네.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유혹에 대응하고 맙니다. 가스가 빠지라고 며칠 전에 개봉해 뒀던 퇴비 한 포를 들고 밭을 한 바퀴 돌고나니 오늘도 해는 중천에 오르고 있습니다. 아침밥을 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가 돼 가고 있습니다. 시간도 세월도 속절없이 빠르게도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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