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키만큼 눈에 덮여 있던 밭에 눈이 녹으니 수확 후 미처 치우지 못한 옥수수 뿌리와 깻단 사이로 밟으면 질퍽질퍽한 땅이 나타납니다. 지난겨울 처마 밑까지 내린 눈으로 오도 가도 못해 눈이라면 끔찍할 정도였는데 아무리 무서운 기세를 뽐내며 산더미처럼 쌓였던 눈이라도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뒷산 앞산이 연두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이제 농사준비를 본격적으로 하라는 신호입니다.

캐내지 못했던 각종 뿌리들과 깻단, 고추단 등을 치우고 경운기로 밭을 갈면 그런대로 밭 모양이 갖춰집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지루하고 끈질긴 잡초들과의 싸움이 시작일 뿐입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땅을 뒤집어 놓아도 며칠 후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더욱 다양한 종류의 풀들이 새롭게 돋아나니 정말 성질이 안 날 수가 없지요. 사실 새봄에 처음으로 돋아나는 풀들은 냉이라든가 달래 같은 먹을거리고 칙칙한 대지에 푸른 생명을 내놓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어김없는 자연의 조화에 감탄합니다만 그 기분도 잠시뿐입니다.

7백여 평 밭농사는 3월 말경 감자를 심으면서 일단 작목별로 구획을 나누고 순차적으로 밭을 정리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공급받은 옥수수종자는 밭 가장자리와 밭 중간 중간에 들깨 심을 자리를 놔두고 낮은 두둑을 만들어 파종하고는 나뭇가지를 꽂아 표시를 해둡니다. 콩 심을 자리와 고추, 고구마, 들깨 심을 자리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1차 경운작업을 한 채로 잡초가 무성하지 말길 바라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습니까.

올해도 어김없이 봄 가뭄이 심합니다. 2월에 2미터가 넘는 눈이 내려 물 걱정은 없으려니 했건만 파종한 옥수수도 감자도 도무지 순이 올라오지 못합니다. 덕분에 잡초들도 자라지 못해 일손은 덜어주는 셈이니 세상사는 이렇듯 균형을 맞춰주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샘물도 퍼 나르고 냇물도 길어다 겨우겨우 새순을 틔운 옥수수와 감자가 억지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데 5월 내내 비는 한 방울도 내릴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신문지멀칭으로 심은 고구마 순은 반이나 말라죽고 말았지만 잡초들은 오히려 품종 교체를 단행하고 있습니다.

망초와 이름 모를 풀들을 어느 정도 뽑고 베어내면 뒤를 이어 엄청난 생명력을 지닌 바랭이들과 쇠비름, 달개비 새싹들이 밭을 뒤덮어 버립니다. 마치 녹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광경에 소름마저 돋을 정도입니다. 쇠비름이야 그래도 찾는 이가 많아 쓸모가 있다지만 바랭이는 잠시라도 한눈을 팔다가는 온 밭을 기어 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통에 방치하다간 결국 바랭이 천국이 되기 십상입니다.

6월 들어 비다운 비가 내렸습니다. 작년 들깨 모종 심느라 하도 고생이 많았던 터라 금년에는 아예 들깨 심을 자리 중 상당 부분에 직파를 시도해볼 요량으로 얕은 골을 파고 씨를 뿌렸더니 순이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도대체 어느 게 들깨고 어느 게 잡초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여러 번 밭을 뒤집고 갈았건만 어디 숨어있다 이렇게 솟아나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검정콩과 흰콩을 심을 자리도 써레와 괭이 삽으로 벌써 세 차례나 엎어 놓았지만 어느새 바랭이들이 빽빽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이러니 농사에 이골이 난 노인네들이 제초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백년이 지나도 분해되지 않는다는 제초제가 땅을 망치는 걸 알면서도 ‘그라목손’을 판매 중지시킨 정책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심정은 당장 힘들고 대안이 없으니 강력한 제초제가 그립기 때문일 겁니다. 하기야 예전에 많은 양을 구입해둔 이들은 지금도 아껴 뿌린다고 하니 먼 미래보다는 당장 눈앞의 고생스런 현실을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 이해는 됩니다만 그래도 후대를 위해서는 자제가 필요하겠지요.

그저 씨 뿌리고 때 되면 거둬들이기만 할 수 있는 잡초 같은 강인한 작목이 탄생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헛된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삼각괭이를 들고 잡초와 한판 벌이기 위해 밭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벼운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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