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류학자들이 최근 밝힌 바에 의하면 까치는 대표적 텃새로 늘 보던 주변사람들이 아닌 낯선 이가 나타났을 때 자기 영역이 침범당할 수도 있다는 본능으로 경고를 하기 위해 운다는 겁니다.

사실 까치야 그 이가 반가운 사람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으니 일단은 경계 태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명절을 맞아 잠시 다니러 온 자녀들일 수도 있을 거고, 아니면 지나가는 나그네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도시에서야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른 채 몇 십 년을 살아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가끔 TV채널이 삭막한 인간사회 어쩌고 운운은 하겠지만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웃에 관심가질 여유를 가진다면 그게 오히려 오지랖이 넓은 반푼이 같은 사람으로 치부될 테니 말이지요.

한곳에 터를 잡고 사는 텃새들이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철새들이 반가울 리 없겠지만, 그래도 다 나름대로 적당히 영역을 정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갑니다. 그러나 텃새들 중 까치만큼 고약한 놈도 별로 없습니다. 떼를 지어 침입자를 공격하고 심지어는 맹금류까지도 쫓아낼 정도니 그 위세는 새들 중 으뜸입니다.

도회지를 떠나 낯선 시골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음은 자연의 이치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질서체계로 움직이는 작은 사회에 뭔가 그 흐름을 깰 수 있는 낯선 움직임이 보인다면 당연히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반발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일단은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우선이니까 그 질서체계로 조용히 들어갈 수 있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볕 잘 드는 곳을 찾아 멋진 전원주택을 짓고 자연을 즐기며 여생을 즐기기 위해서는 때론 납작 엎드리는 방법도 필요합니다. 일단은 침입자라는 입장에서 조용히 발을 디디는 거지요. 괜히 으스대봐야 돌아오는 건 텃세라는 괴롭힘뿐입니다.

사람 사는데 뭐 특별한 게 있겠습니까. 그저 그네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면 그만입니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약한 이들이 있는 건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니 감내할 밖에요.

건너편에 혼자 살고 있는 할머니는 80이 훨씬 넘은 고령임에도 아직 농사일도 직접 하십니다. 자식들도 여럿 있어 편하게 모시려고 해도 본인이 정말 싫다며 손사래를 치신다고 합니다. 제일 가깝게 사는 이웃분이라 가끔 인사를 드리곤 하는데 어느 날인가 큰아드님이 우리를 찾아왔더군요. 늘 혼자 계셔서 불안했었는데 바라다 보이는 곳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 안심이 된다는 요지의 인사와 함께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주더군요.

손을 먼저 내밀면 그 손을 뿌리치는 야박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곳은 워낙 가구 수도 많지 않고 거주하시는 분들도 연세가 많은 분들이라 특별히 텃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역에서는 원주민들과 적극적으로 맞서기 위해 ‘객지인연합회’라는 단체까지 만들어 법적 투쟁까지도 한다니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입니다. 같이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토박이든 객지인이든 함께 의논도 하고 물러설 줄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텃새인 까치가 길조(吉鳥)에서 이제는 골치 아픈 해조(害鳥)로 뒤바뀐 것은 그 고약한 영역 수호에 집착하는 성격 때문일 겁니다. 자기 영역을 지키는 일은 본능이라지만 세상은 어울려 살지 않으면 반드시 파탄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텃새가 텃세를 부리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름다운 공존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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