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산다는 건 한바탕 꿈속을 헤매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지나간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그저 아련하기만 하니 뭔들 죽기 살기로 붙잡을 게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언제나 오늘을 살아가야하는 어려움은 현재의 고통입니다. 결국 그 고통과 고뇌도 희미한 과거의 추억으로 남겨질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오늘 머리를 쥐어뜯는 게 인생이지요.

직장에서의 정년은 홀가분하게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잉여인간(?)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시점이기도 하니까요. 누구나 노년의 안락한 삶을 기대하지만 그 안락함이라는 게 세속적인 낭만이라면 그리 쉽게 이루기가 힘들게고, 그저 건강하게 사지를 움직이면서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기만 바란다면 그건 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도시에서 가졌던 모든 걸 털어내고 낯선 시골로 터전을 옮기는 일은 손가락 열 개도 모자랄 만큼 반대할 이유가 많이 생깁니다. 이게 걸리고 저게 걸리고, 결국 세월이 흐르고 흐른 만큼 주름살만 늘 테니 사실 따지고 보면 향촌(向村)만큼 어려운 일도 없긴 할 겁니다. 막상 온갖 정보를 토대로 팔도강산을 누비는 일부터 만만찮은 어려움입니다. 귀촌이니 귀농이니 하는 말이 세상의 화두가 되면서 넘쳐나는 정보는 도움은커녕 마치 기획부동산업자들의 잔치판같이 되기가 십상이니까요.

그저 놀이삼아 유람삼아 전라도로 경상도로, 또 충청도로 돌다보니 종당에는 터전을 옮길 곳을 찾게 되더군요. 겨울이 시작되는 12월부터 시작된 탐색작업이 꽃피는 5월에야 마감이 된 건 오로지 눈부신 신록 때문이었습니다. 좁은 계곡 사이로 맑은 시냇물도 흐르고 앞산 뒷산에 물오른 새 가지들에서 뿜어내는 향기가 집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고 말았으니까요. 약간 경사진 산비탈에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면 아주 외딴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웃들과 보대낄 일도 없을 적당한 거리에 허름하지만 깨끗한 양철기와집이 서 있고 집 뒤로는 매실나무들이 줄지어 반기니 어찌 깜빡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우리내외가 마음에 들어도 내 논 사람이 싫다면 그만이니까 그 문턱을 넘는 일도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상대를 탐색해보는 일차 면담이 끝나고 다시 만나는 날, 초보농사꾼의 삶을 살려는 의지를 시험하는 인턴체험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5월이긴 하지만 밤에는 춥다며 보일러를 켜주며 하룻밤 묵고 가라는 말에 그만 덜컥 승낙한 게 함정이었습니다. 새벽부터 쑥부쟁이 나물 밭에 잡초를 뽑아야 된다며 집주인이 나서니 별다른 도리 없이 그 뒤를 졸졸 따라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컴퓨터화면이나 보며 손가락운동이나 하던 게 전부였던 사람이 종일 허리 구부려 풀 뽑고 호미질을 하니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힘든 내색을 보이면 나이가 육십이 넘은 이가 무슨 농사일을 하겠냐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할 것 같아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꿈지럭거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여튼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일을 잘 한다고 칭찬은 받았습니다만 그게 어디 잘해서 그랬겠습니까. 낑낑대며 땀을 흘리니 그저 그럭저럭 땅은 놀리지 않고 뭔가 할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지요. 집사람도 내가 일하는 게 신기한 모양인지 놀라긴 하더군요.

이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시골로 찾아가는 과정을 몇 차례 하다 보니 서로 웬만큼 속내도 알게 되고 본 계약을 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거처를 옮기는 일은 정말 인생에 있어 큰 일 중 하나입니다.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 과정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사이 매실을 수확해 포장하는 일이나, 들깨 모종을 옮겨 심는 일은 시골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양념 같은 이벤트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집을 약간 손보고 우리내외가 살기 시작한지 2년여가 된 이곳은 강원도 동해시의 비천동입니다.

[편집자 주 - 이번 호부터 본지에서 편집국장으로 정년퇴임한 이대식 씨가 귀농을 계획하고 정착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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