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곡물조달시스템, 전면수정 불가피


 9월말, aT 그레인 컴퍼니 ‘법인청산’

총체적 부실에 따른 원점 재검토 필요할 듯



미국내 곡물 유통망 확보를 위해 야심차게 출범했던 aT 그레인 컴퍼니(aT Grain Company)가 9월말을 기한으로 청산절차를 밟고 있다. 더욱이 지난 7월에는 국내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내 곡물유통회사(EGT)의 20% 지분을 가지고 있던 STX팬오션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와의 지분매각 협상 도중, 외국기업에 가로채기를 당하면서 국가식량조달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 야심찬 출발 ‘aT 그레인 컴퍼니’

aT 그레인 컴퍼니는 지난 2011년 4월 미국에서 생산되는 대두, 옥수수, 밀 등 주요 곡물에 대한 안정적 도입을 위해 산지와 수출 E/L(EL, 곡물의 건조와 저장 및 분류 운송하는 종합시설)의 확보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당시 aT와 4개 민간기업이 참여를 결정했지만, 최종적으로는 aT 55%, 민간 컨소시엄(삼성물산, 한진, STX)이 45%를 투자했다.

출범과 함께 aT 그레인 컨퍼니는 2011년 말까지 식용 콩과 옥수수 각 5만톤을 확보하고, 2015년까지 밀 100만 톤, 콩, 50만 톤, 옥수수 250만톤 등 총 400만 톤을 자체 확보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또한 확보한 곡물에 대해서는 삼성물산을 통해 해외에 재판매하는 트레이딩 사업까지 구상, 국내 조달과 해외 판매를 5:5로 계획할 정도로 야심찼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2011년 aT 그레인 컴퍼니를 통해 들여온 곡물은 목표물량의 10% 수준인 콩 1만 1,000톤에 불과했다.

aT 그레인 컴퍼니는 2011년 말부터 미국내 곡물기업 69곳에 인수합병(M&A)를 제안했고, 2012년 9월까지 인수대상 10여개 기업으로부터는 지분 일부를 aT 그레인 컴퍼니가 매입하는 방식의 ‘조인트 벤처’(합자투자사) 형태의 투자를 제안 받았다.

당시 aT 그레인 컴퍼니 김학수 사장은 “조인트 벤처 형태가 상대방의 곡물사업 시스템과 노하우, 마케팅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양의 곡물조달을 보장받고 투자 리스크로 최소화할 수 있다”고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aT 그레인 컴퍼니는 M&A 방식을 포기하고, 지분 50% 가량을 현금 출자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자 국정감사에서 aT 그레인 컴퍼니에 대한 실적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2012년 국정감사에서는 “올해(2012년) 도입 계획량 92만톤(콩 7만톤, 옥수수 75만톤, 밀 10만톤) 가운데, 현재까지 도입실적이 전무한 것으로 나타나 국가곡물조달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질타가 이어졌다.

◆ 우여곡절 끝 ‘청산’…“국가식량조달시스템 수정 불가피할 듯”

올해 들면서 aT 그레인 컴퍼니의 최초 출자금이 소진되면서 참여기업들의 추가 출자가 필요한 상황이 닥쳤다. 그러나 민간참여 기업들이 추가 출자를 꺼려했고, 특히 유동성 위기에 몰린 STX 가 사업에서 탈퇴하면서 aT 그레인 컴퍼니의 법인 청산이 지난 8월에 결정됐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aT 내부적으로도 8월 정기 이사회에서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aT 곡물사업소 관계자에 따르면 “aT 그레인 컨퍼니는 미국내 곡물회사 관련 투자물권을 발굴하기 위해 설립된 법인”이라며 “여러 차례 투자물권에 대한 협상이 있었지만, 평가사의 자문 내용과 달리 곡물업체들의 과다한 프리미엄 요구로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추가 출자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는데, 민간 참여사 모두가 추가출자를 포기했기 때문에 청산절차를 밟게됐다”면서 “이는 국가식량조달시스템의 여러 가지 사업 중 하나일 뿐으로, 곡물 E/L 사업은 원점에서 재검토 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가곡물조달시스템은 국정과제로 선정되어 있기 때문에 aT 그레인 컴퍼니의 청산이 곧 폐지는 아니다. 그러나 올해 농림축산식품부 업무보고에 따르면 국가곡물조달시스템을 통한 해외 곡물 도입량은 2013년 126만톤에서 2017년까지 306만톤에 달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국내 유일의 美곡물회사 지분 뺏겨

지난 2009년 국내 기업인 STX팬오션은 세계 4위 곡물유통회사 ‘번기’(Bunge), 일본 종합상사 ‘이토추’(Itochu)와 함께 2억 달러를 출자해 ‘EGT’를 설립하고 20% 지분을 확보했다.

EGT는 미국 전역에 곡물 저장 및 부두, 하역설비 등을 갖추고 있는 선두권 곡물유통회사다. 밀, 콩, 옥수수 등의 곡물 연간 처리 규모가 우리나라 한 해 곡물 수입량의 절반에 가까운 800만톤 수준으로, 그동안 STX팬오션이 160만톤의 곡물 처리를 맡아 식량안보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평가다.

그런데 올해 초 STX팬오션이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가고, 그룹의 유동성 위기로 인해 EGT 지분 20% 전량이 ‘프라이빗 딜’(비공개 매각) 방식의 매물로 나왔다. 이에 aT가 글로벌 식량위기에 대응한 곡물의 안정적 조달을 위해 지분 인수전에 뛰어들었고, 지난 4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막판 우선매수권을 행사하고 나선 번기와 이토추에게 가로채기 당하면서, 국내 유일의 국제곡물회사 지분이 사라졌다. 이에 대해 aT 관계자는 “우선매수권 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그러나, 지분 재매각이 있을 수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반면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글로벌 곡물유통회사에 대한 지분을 가지면 국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밀, 콩, 옥수수 등의 물량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면서 “당분간 EGT와 같은 글로벌 곡물회사의 지분이 매물로 나올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중장기 계획으로 접근해야”

이에 따라 세계 곡물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세계 곡물시장은 4대 메이저(카길, ADM, 번기, 루이드레퓌스)가 장악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곡물의 70%이상이 4대 메이저나 ‘마루베니’, ‘미쓰비시’ 등 일본 종합상사들이 담당하고 있다.

국가곡물조달시스템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관련업계와 학계 등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의 경우 1960년대 중반부터 곡물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민관이 국제곡물유통업에 진출하고, 국가비축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3년차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수 차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높은 진입장벽과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포기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쌀을 제외하면 유사시를 대비해 비축하고 있는 곡물이 없다.

이는 급변하는 국제곡물가격에 대한 완충제 없이 맨몸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국가곡물조달시스템에 대한 논란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사업부진에 대한 질타만으로는 미래가 없다. 장기적인 안목에 따른 철저한 계획수립을 위한 대안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국제선물시장을 통한 곡물조달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과 같이 국내 선물거래소에 수입옥수수 등 주요 곡물을 상장시켜 국내 사료생산자나 무역업자가 가격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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