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와 밥상의 위기

신자유주의 개방농정과 농업의 위기 그리고 세계식량체계로의 편입은 먹거리의 위기로 이어졌고, 상호간에 악순환의 고리가 생겨 위기가 악화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즉, 농업의 위기는 먹거리의 위기를 동반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개방농정과 세계식량체계는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원인과 배경에서 발생한 한국의 먹거리 위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대규모 식량부족과 국제 곡물가격의 폭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식량위기가 현실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식량자급률은 25.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둘째, 먹거리의 약 3/4을 세계식량체계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먹거리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공급 기반도 매우 취약하다. 안전한 먹거리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친환경 유기농산물은 틈새시장의 수요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 시장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생산 및 소비가 증가하지 않고 정체상태에 놓여 있다. 틈새시장을 넘어 확대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

셋째, 취약한 생산·공급 기반 때문에 불안정한 기상변화가 농산물대란과 가격폭등의 발생 빈도 및 강도를 증가시켜 먹거리에 관한 국민들의 비용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거리의 가격안정을 실현할 수 있는 정부의 적극적인 가격정책과 제도장치는 여전히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

넷째, 농산물대란과 가격폭등은 특히 저소득층, 빈곤층, 소외계층의 고통부담을 높여 먹거리의 양극화를 유발하고 건강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하위계층으로 갈수록 값싼 먹거리를 많이 구입하고,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각종 질병과 사망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 먹거리의 양극화는 보건의료 등과 같은 사회복지비용의 부담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농업과 먹거리 정책의 방향전환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에 기초한 대안적인 먹거리 정책은 앞에서 언급한 현재의 농업 및 먹거리 위기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먹거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유엔 국제식량농업기구(UN/FAO), 유엔 인권이사회(UN/HRC) 등이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고, 국제적인 시민사회와 농민연대들이 핵심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식량주권(food sovereignty)의 제도화를 실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 약 25% 수준의 식량자급률을 중장기적으로 50%까지 높여 국내의 안정적인 생산공급 기반을 확대해야 하며, 세계식량체계에 지배받지 않는 다양한 사회적 먹거리 영역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식량주권의 제도화는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함으로써 먹거리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먹거리에 따른 건강과 안전의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의 질을 고르게 향상시킬 수 있다. 먹거리 기본권은 개인과 가계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할 사회적인 문제로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주요 과제의 하나이다.


국민 먹거리 기본권 보장 방안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 보장을 위해서는 첫째,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속가능성과 안정성 측면에서 국내 생산·공급 기반을 우선적으로 확대해야 하며, 국제시장에서의 조달시스템 강화 및 국가간 협력을 통한 공급확보 등을 보완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남북 농업협력의 확대를 통해 한반도 전체의 식량자급 기반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며, 특히 쌀(남)과 잡곡(북)의 협력을 우선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 세계식량체계가 초래하는 먹거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안전한 먹거리를 국민에게 생산·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속가능한 생태농업의 기반을 확대하고, 안전한 친환경 농산물의 생산·공급을 확대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공공 영역에서 사회적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생태농업과 안전한 먹거리의 생산·공급 기반 확대를 위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공급식 프로그램, 공동체 지원농업, 도농공동체 등과 같은 지역먹거리체계를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셋째, 국제 곡물가격의 폭등과 애그플레이션(Agflation)으로 인한 먹거리의 가격폭등으로부터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 식량자급률의 제고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생산·공급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전지구적 식량위기와 가격폭등에 대한 국내 대응능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국제 곡물가격 폭등과 이상기후 등으로 인한 국내 먹거리 가격의 폭등을 예방하기 위해 최고가격을 설정하는 등 기초농산물의 가격안정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넷째, 먹거리의 양극화에 따른 건강과 빈곤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국민의 보편적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공공 영역에서 창출할 뿐만 아니라 안전한 먹거리의 전달체계 역시 이윤과 수익 보다는 공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구축해야 한다. 빈곤층과 저소득층에 대한 보편적인 식량지원 프로그램, 사회복지시설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한 공공조달 등 사회복지와 먹거리 기본권을 연계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먹거리의 생산자인 농민의 기본권 보장이 동반돼야 한다. 우선 농민이 안심하고 생산에 전념할 수 있는 제도장치를 마련해야 하며, 다음으로 농산물의 가격안정과 소득보장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이러한 농업과 먹거리 정책의 목표와 방향에 부합하도록 식량주권을 제도화하는 핵심과제로 (가칭)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를 제안하고자 한다.


농업과 먹거리 정책의 핵심

(가칭)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란 기초 농산물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 가격안정, 저소득층 및 공공급식에 대한 지원 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포괄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고, 안전한 먹거리의 생산·공급을 확대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기초농산물의 안정적인 국내 생산·공급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식량자급률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고, 농산물 가격과 농가소득을 보장하며, 저소득층 및 공공급식에 대한 기초농산물 지원 등과 같은 제도장치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책임이자 의무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생산자 농민이 안심하고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측면에서 농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과 직접 연계돼 있다.

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란 결국 국가의 책임하에 기초농산물의 안정적인 공급체계를 구축하는 국가책임제도라 할 수 있다. 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를 구성하는 핵심 정책과제는 ①식량자급률 50% 목표 실현과 ②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③먹거리 복지를 위한 기초농산물 지원 프로그램 등이다.

또한 위와 연계된 주요 정책과제로는 ①중소 가족농 중심의 협동체 육성 ②농지자원의 보전 ③지속가능한 생태농업 발전 ④먹거리 안전관리 체계 강화 ⑤한반도 공동 식량자급 확대 등이 있다.

먹거리는 국민의 삶의 질을 유지하고 높이는데 기초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먹거리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책무에 해당하는 것이다. 특히나 전 지구적 식량위기가 확산되고, 먹거리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가의 높은 책임성과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그동안 UR/WTO체제를 핑계로, 시장논리를 맹신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이 방기한 결과가 지금의 먹거리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이라도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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