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형 진  농업인·시인


간밤에 눈이 많이도 내렸습니다. 새벽 두시쯤 깨어 일어서 문을 열고 밖을 살폈을 때는 마당에 발자국 눈 정도가 쌓였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천지가 눈 세상입니다. 수돗가 함석지붕도 그 옆 절구통도 장독대도 형적만 남기고 눈에 묻혔습니다. 첫눈이 이렇게 많이 왔으니 금년 겨울도 어지간할라나 봅니다.

제가 지금도 저 아랫동네 제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았다면 눈도 새벽에 일어나 일찌감치 치워내야 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집 앞과 길을 쓸어 놓아야 이웃이 내 집 앞까지 쓸어주는 민망함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또 혹시라도 아침에 누가 우리 집을 찾아오거나 내가 남의 집을 찾아갈 때 숫눈을 밟으며 마당을 가로지르는 것은 미안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외딴집에 사는 지금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좀 늦게라도 앞 뒷마당 눈을 다 밀어다가 한곳에 치워서 마당을 보송하게 하면 좀 좋겠습니까만 힘이 들어서도 못합니다. 계속 퍼붓는 눈이 그칠 것 같지도 않고요. 하지만 예전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눈 쌓인 마당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마당뿐만이 아니라 집에서 아스팔트 포장된 행길까지 나가는 약 2백여 미터의 비탈진 비포장길은 치워내지 않으면 차가 나갈 수 없으니 더욱 답답합니다. 외딴 것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지만 스스로 하는 그것과 강제적인 것은 이렇듯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에 눈 많이 오는 게 이제는 그다지 달갑지 않습니다. 추운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관절이 좋지 않은 탓에 움직이기가 참 괴로워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마 제가 늙었다는 증거겠지요. 순 하디 순한 흰색의 눈을 보며 이 아침에 나이를 자각하는 일이 유쾌한 심사는 아니겠습니다.

몽당비 하나를 찾아들고 그래도 토방 아래와 수돗가 장독대와 뒷간 길을 쓸어냅니다. 한사람 다니면 족하니까 그것도 아주 좁은 길만 냅니다. 눈은 치워내지 않을 바엔 가능하면 쌓인 그대로 놔두어야 뭉쳐있지 않고 빨리 녹습니다. 집주변을 그렇게 한 바퀴 돌자 몸에서 어느새 열이 나는 게 느껴집니다. 감기를 앓고 나서 아직 몸이 개운하지 않은 탓에 조심해야 합니다.

아내가 나오기 전에 아궁이에 불을 때서 솥에 물도 데우고 정지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비를 들고 물거리(잔가지) 나무 묶어서 쌓아둔 곳을 쓸어내고 반 다발 정도의 나무를 부엌에 들여놓습니다. 우물에서 물 길어다 먹는 옛날 같으면 물질통지고 가서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부어주어야 하는 일이 더 큰일이겠습니다만 지금은 부엌 싱크대에서 물이 나오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흰 눈을 배경해서 그런지 굴뚝을 타고 오르는 연기가 더 선명합니다. 타닥탁 소리를 내며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오늘은 더 잉걸대는 듯합니다. 부엌에 찬 연기를 몰아낼 겸 문을 조금 열어 놓습니다. 그 새 무슨 온기가 전해졌는지 아니면 눈은 와도 날은 푸근해서 그런지 추녀에 눈석임물이 떨어집니다. 새 중에도 바지런한 놈이 있는지 곤줄박이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마루 끝에 앉아 무엇인가를 기웃거립니다. 이대로 눈이 많이 오면 방아 찧고 나온 싸라기를 마루나 토방, 담장 등의 따뜻한 곳에 조금씩 놔주어야겠습니다.

처음엔 잘 먹지 않아도 나중 보면 어느새 다 먹어서 없어집니다. 눈이 오는 겨울 외딴집의 한 소일거리가 그 정도일 뿐으로 이제 무료한 날이 시작될 겁니다. 하기는 날이 좋으면 나무야 해야지요.

어느새 솥에서도 눈물이 나자 뒤 미쳐 김이 오릅니다. 눈이 오신 줄 아는지 아내는 아직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가봅니다. 하기야  대안공동체 학교에 다니는 초등 6학년 막둥이 녀석까지 해마다 그렇듯이 이미 방학을 했으니 잠 없는 저와는 달리 일찍 나올 리가 없지요. 어젯밤 늦게까지 텔레비전 드라마도 봤을 테고요. 언제 부턴가 초저녁잠이 많아진 저는 늘 저녁 아홉 시 뉴스를 끝까지 다 못 보고 일찍 자고 새벽 세 시전에 일어나는 것이 이제 버릇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렇게 잠이 깨면 다시 깊은 잠을 자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뭔가를 꼼지락 거려보기도 합니다만 밀린 원고나 편지 따위가 아니면 그냥 누운 채 책 몇 줄, 신문 몇 장 읽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날이 밝아 오는 게 참 기다려집니다. 집 앞 큰길에 경광등소리를 울리며 제설차가 양방향으로 조금 시차를 두고 지나갑니다. 눈 이불을 덮고 밤새 길게 누웠던 길이 깨어나면 사람들이 그 길을 밟고 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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