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농업인·시인

참으로 오랜만에 비가 왔습니다. 더위가 물러가고 처음인가 봅니다. 좀 더 자세히 따져보니 약 50일 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가뭄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을 겁니다. 도시에 사시는 분들은 수도꼭지만 열면 아무 때라도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니까요.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김장채소의 경우에는 2주 만 비가 오지 않아도 물을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름 티도 잘 나지 않고 폭이 차오르지 않습니다. 마늘도 심어 놓고 비가 오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으니 그도 또한 물을 줘야 합니다. 양파모종은 더 말 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날마다 스프링클러 이 밭 저 밭으로 옮겨 놓으며 물주는 것 참 힘든 일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 번씩은 겪는 일이기는 합니다. 우리나라는 가을에 비가 적게 오는 곳이니까요.

저 또한 비가 오지 않아서 정말 괴로운 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집 뒤 계곡 약 400여 미터 위쪽에서부터 호스로 물을 끌어다 먹는데 그 물이 마른지 한 달은 되나 봅니다. 냇가에 물이 마를 것에 대비해서 커다란 고무 자배기를 여러 개 준비해 두고 물을 받아 뒀다가 쓰긴 하는데 마실 물은 날마다 따로 수돗물 나오는데 가서 받아와야 합니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까 통의 물도 함부로 쓸 수 없어 빨래 같은 것은 모아 뒀다 친척집의 신세를 집니다.

제 사는 곳이 바닷가 마을이기도 한지라 우물(관정을) 팔라치면 짠물이 나와서 그도 못합니다. 수도를 왜 놓지 않느냐고요? 마을에서 살다가 10여 년 전쯤에 좀 떨어진 산 밑 제 밭이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옮겨 살게 되었는데 수도 선이 지나가는 곳까지의 거리가 200미터 쯤 됩니다. 거기서부터 수도를 끌어오자니 200만원도 더 들겠지 뭡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산골짝의 물을 먹게 된 것이지요.

사정이 이러니 가뭄이 들면 농작물에게 줄 물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걸 계산해서 농사를 짓습니다. 가령 김장채소는 폭 차지 않을 것 생각해서 양을 좀 많게 심고 조금 일찍 심는 식이지요. 가뭄이 들어도 스프링클러 팍팍 돌려대는 농사꾼이 저는 참 걱정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저는 옛날부터 견뎌왔으므로 그렇다 쳐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제일 고생인 사람이 제 안식구입니다. 그도 저 따라서 견디고 사는 일에 이력이 날만큼 난 사람이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사람들이 물 귀한 줄 알며 살아봐야 한다’는 제 말에는 썩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들 그런 말을 하고 싶을 턱이 없습니다.

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아서 한 통 한 통 물을 길을 때면 물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더군요. 우리는 평소에 물을 너무 많이 쓴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서부터 물이 없어서 고생하는 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까지 안타까운 마음이 뻗쳐 간다는 것 말입니다. 제 그런 오죽잖은 마음이라도 그냥 넘기기 언짢아서 얘들에게 하는 소리인데, 하다보면 수도 놓지 않는다고 볼 메인 안식구에게까지 들으라는 듯이 하는 잔소리 같은 것이니까요. 어쨌든 형편이 닿으면 수도는 언제 놔도 놔야 할 것 같습니다. 점점 나이 먹어서 쪼그라져가는 안식구에게 마냥 젊었을 때처럼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참 오랜만에 비가 오기는 왔습니다. 날마다 TV뉴스의 일기예보 때 비소식 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려서인지 어느 때 그 비가 온다고 드디어 비소식이 왔습니다. 그러나 눈 씻고 봐도 어느 지방에 얼마쯤 온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그저 3~4일 후에 전국적으로 오겠다고만 하더니 그 3~4일 후에 그야말로 병아리 눈물만큼이나 왔습니다.

마당에 내다 놓아 둔, 위아래 똑같이 생긴 그릇으로 만든 제 측우기에 의하면 약 5mm가 왔습니다. 새악씨 방귀처럼이나 왔습니다. 저 아랫녘에서부터 몰려오다가 힘이 빠져 어디에 주저앉았는지 온다던 소식 땜만 하는 듯 그렇게 왔습니다. ‘가을비는 구럭 쓰고도 바워낸다’고 했지만 그 말 틀리게 하지 않으려는 듯, 설마 하는 마음을 무너뜨리려는 듯 왔습니다.

하지만 그 비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이끼마저 말라버린 냇가에, 벌겋게 타 들어가던 산중턱의 나무들에게, 슬레이트 지붕 위에, 먼지 풀풀 나는 마당과 자갈길에, 배추밭과 마늘밭에, 양파모판에, 비록 적은 것이지만 저울로 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정말로 똑같게 왔습니다.

산에 나무나 들에 풀이나 밭에 농작물이나 모두 여름의 그 무더웠던 땟국을 씻었습니다. 이제 맑은 얼굴들로 언젠가 다시 올 그것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퍼서 쓰는 물로는 목마름을 달랠 수도 공평할 수도 없는데 오직 저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것이라야 이렇게 온전합니다. 많이 내려 지겨울 때도, 적게 내려 감질날 때도 비는 항상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저작권자 © 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