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식량주권의 제도화

식량주권은 농업과 식량(먹거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그동안 개별 국가 단위에서 식량주권의 제도화를 통해 실질적인 정책변화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어 왔다. 식량주권을 제도화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실제 정책은 세 유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라 아니라 모든 유형을 포괄하되 예산과 자원의 한계를 고려하여 각 유형별 정책의 시행범위를 탄력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첫째, 소득적 제도화의 형태가 있는데, 이는 복지정책 차원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먹거리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취약계층에 대한 먹거리 보장을 제도화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다.
둘째, 식량권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형태가 있는데, 유엔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 담고 있는 식량권(혹은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을 기본적 인권의 관점에서 보장하는 것으로 쿠바,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 많은 나라들에서 식량권의 내용을 헌법에 담고 있다.

셋째, 적극적 제도화의 형태로 식량주권을 헌법 혹은 법률로 보장하는 것인데, 아프리카의 말리, 세네갈, 아시아의 네팔, 인도, 라틴아메리카의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는 국가 차원에서 식량주권 개념을 받아들이고 이를 헌법 속에 명기하거나 관련 내용을 법률로 규정하는 한편 식량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식량주권의 패러다임을 정책 및 제도화하는 것은 개별 국가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으며, 제도화는 크게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는 주로 내용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식량주권 제도화의 내용이 되는 것은 결국 식량(먹거리) 정책이며, 한국의 식량(먹거리) 정책은 앞에서 언급한 식량(먹거리) 위기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하는 것임. 이를 위해 국내의 생산·공급 기반을 우선적으로 확대하면서 국가간 협력을 통한 안정적 공급확보 및 국제시장에서의 조달시스템 강화 등을 보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둘째, 세계식량체계가 초래하는 먹거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안전한 먹거리를 국민에게 생산·공급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지속가능한 생태농업과 안전한 먹거리의 생산·공급 기반 확대 차원에서 지역먹거리체계를 통한 사회적 수요를 적극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셋째, 국제 곡물가격의 폭등과 애그플레이션(Agflation)으로 인한 먹거리의 가격폭등으로부터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기초농산물에 대한 적극적인 가격정책을 통해 가격안정을 위한 제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넷째, 먹거리의 양극화에 따른 건강과 빈곤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빈곤층과 저소득층에 대한 보편적인 식량지원 프로그램, 사회복지시설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한 공공조달 등 복지와 먹거리를 연계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식량(먹거리) 정책의 방향전환은 당연히 농업정책의 방향전환도 필요로 하는데, 우선 농민이 안심하고 생산에 전념할 수 있는 제도장치를 마련해야 하며, 다음으로 농산물의 가격안정과 소득보장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식량주권 제도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먹거리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며, 동시에 생산자인 농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량주권과 먹거리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한 (가칭)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의 핵심은 취약한 기초농산물의 생산·공급 기반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먹거리 복지정책을 연계시키는 것에 있다.

이러한 정책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1)식량자급률 50% 목표 실현 (2)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3)기초농산물 지원 프로그램 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정책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연관된 정책과제로는 생산주체의 문제, 농지자원의 보전문제, 지속가능한 생태농업의 발전, 먹거리안전 관리체계 강화, 한반도 공동 식량자급기반 확대 등이 있다.


식량자급률 50% 목표 실현

약 25〜27% 수준의 세계 최하위 식량자급률은 극도로 취약한 국내 생산·공급 기반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동안 국내 논의들은 대체로 국내 식량자급률의 적정 수준은 50% 정도라고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정부가 강조하는 해외농업개발 및 국제곡물조달시스템은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고, 예외적으로 가능한 틈새시장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보완적인 식량확보 조치로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결국 식량의 생산·공급 기반을 강화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국내 식량자급률을 높이는데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하며, 중장기적으로 남북간 공동 식량보장 및 인근 국가가 식량협력 체계 구축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현행 쌀 생산기반을 최대한 유지해 나가면서, 단기적으로는 탄력적인 생산조정, 중기적으로는 대북 쌀지원 재개, 장기적으로는 가공용을 포함한 소비 촉진을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둘째, 쌀 이외에 밀, 보리, 콩 등과 같은 곡물류의 자급률을 높여 나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모작 등을 통한 경지이용률을 높이는데 초점을 두고 이모작의 경우 경관보전직불제와 같은 소득연계 방안이 필요하다.

셋째, 중장기적으로 곡물사료 수입을 감소시켜 나가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국내 조사료 생산기반을 확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류소비 감소를 유도하는 식생활교육이 중점적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넷째, 학교급식을 포함한 전반적인 공공급식 프로그램과 먹거리복지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것에 보조를 맞추어 식재료를 국내 농산물로 조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공공분야의 국내산 소비촉진을 추진해야 한다.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도

기초농산물의 취약한 국내 생산·공급 기반을 강화하고 식량자급률 50%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농산물의 생산비를 보장하는 가격정책과 농업의 다원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소득정책이 필수적이며, 농산물대란 및 가격폭등을 방지하고 가격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가격정책이 필요하다.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는 이러한 적극적인 가격정책과 소득정책을 포괄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먹거리의 기초가 되는 주요 농산물을 대상으로 정부의 직접수매, 농협 등 생산자단체를 통한 계약재배 등과 같은 방식을 통해 안정적인 생산기반을 유지하고, 생산비를 보장하는 품목별 최저가격(하한선)과 국민이 수용가능한 최고가격(상한선)을 설정하여 기초농산물의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의 직접수매 및 농협 등을 통한 계약재배 등은 모두 공적 재원을 활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가 되는 것이다.

현행 WTO체제하에서도 적극적인 가격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에 필요한 보조금의 총액규모 역시 적극적인 가격정책을 시행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다.
농림수산식품부 자료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가 활용할 수 있는 ‘감축대상보조금’(AMS) 규모는 약 1조4천9백억원인데, 지금 당장이라도 2004년과 같은 추곡수매(가격지지정책)를 시행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현행 고정 직접지불금은 허용보조금이기 때문에 수매제도(가격지지정책)와 병행실시가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WTO가 허용하고 있는 ‘최소허용보조금’도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농업 총생산액 약 40조원의 10%에 해당하는 약 4조원 규모로서 품목 특정 혹은 품목 불특정 방식으로 적극적인 가격정책에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적어도 약 5조4천9백억원 정도가 적극적인 가격정책에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보조금의 한도는 전혀 부족함이 없으며, 여기에 고정 직접지불금과 같은 다양한 허용보조금 제도를 결합하여 가격정책과 소득정책을 병행할 수도 있다.

게다가 현재 우리 정부가 가격정책과 관련하여 실질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예산 및 기금의 규모는 양곡관리특별회계, 농산물가격안정기금, 변동직불금 등 약 3조4천억원이 달한다. WTO에서 인정하는 보조금 총액수준과 우리 정부가 실제 운용하는 재원규모를 볼 때 적극적인 가격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남은 문제는 WTO의 허용규정과 보조금의 허용한도 내에서 정부가 운용하고 있는 각종 재원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인데, 이 부분은 현행 정부의 가격 관련 정책을 전체적으로 재검토하여 적극적인 가격정책과 제도장치로 새롭게 개편·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기초농산물 지원 프로그램 확대

사회적 통념과는 다르게 먹거리 양극화와 건강 불평등 문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급식지원을 받는 결식아동이 2009년 기준 45만명에 달하고 교과부로부터 무료급식을 받았던 초중고생이 50만명이 넘었고, 주로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급식에 제공되는 먹거리는 주로 수입 농산물과 냉동식품을 식재료로 사용하고 있으며, 빈곤층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의 경우 인스턴트식품이나 패스트푸드에 쉽게 노출돼 있다.

특히 2007년 보건복지가족부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만 65세 이상 독거노인의 평균 섭취량은 권장섭취량의 50%에도 못 미치고 있으며, 저소득층 노인들의 수치는 더욱 낮게 나타났다. 결식률과 영양섭취의 차이는 건강 불평등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데, 서울 강남구에 비해 강북구에서 매년 378명이 더 많이 사망하며 소득수준 하위 20%의 사망률은 상위 20%의 2.3배에 달하고 있으며,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식원성 질병의 유병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먹거리 양극화를 해소하고 건강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먹거리와 관련된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연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학교급식 지원, 복지시설 급식 지원, 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정부양곡 50% 할인, 여성, 유아 및 어린이를 위한 모자 영양공급(WIC) 프로그램, 푸드뱅크 지원 등 국내외 다양한 사례를 분석하여 기초농산물 지원 프로그램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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