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기상이변과 이로 인한 국제곡물가격 급등, 국내 농산물 자급과 수급의 어려움 가중, 먹거리 안전에 대한 위협 등은 먹거리정책 패러다임 자체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먹거리정책의 대안 패러다임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호에서는 먹거리위기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대안의 패러다임을 살펴보고, 다음호에서는 제도화방안의 세부내용으로 국민기초식량보장체계에 대해 싣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개방농정

198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농업정책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이 확대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은 대외적으로는 농산물 시장개방의 확대를 불변의 전제조건으로 수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농업구조조정을 농정의 기본골격으로 삼고 있다. 1991년 농어촌구조개선대책에서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농업구조조정은 변하지 않는 농정 기조로 그 지위를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농업구조조정의 핵심은 소위 ‘선택과 집중’에 따라 농지와 농기계 등 농업자원을 소수의 정예농가에 선별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규모화를 통해 경쟁력을 갖추도록 만들겠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원천적인 소규모 농지면적의 한계와 생산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와 토지용역비를 고려할 때 비용 및 가격 측면에서의 국제경쟁력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 오히려 정부 지원이 집중된 전업농일수록 경쟁력은 갖추지 못한 채 자금지원에 따른 심각한 농가부채만 떠안게 됐고, 결국 나중에는 정부 스스로 가격(비용)경쟁력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친환경과 기능성에 기초한 고품질 농산물에 초점을 맞추고 가격경쟁력 대신 품질경쟁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전히 소수의 전업농에 대한 선별적인 집중지원이라는 농정기조는 그대로 유지됐고, 다만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는 대다수의 중소 가족농에 대해서는 직간접적인 소득지원 및 부담경감 등을 통해 급격한 붕괴를 막고자 하는 관심을 보이는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의 농정은 전업농 보다 더욱 규모화된 극소수의 주업농과 기업농을 강조하면서 돈 되는 수출농업을 육성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동시에 농민층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은 축소 내지 폐지하면서 농업구조조정을 더욱 가혹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농촌사회의 양극화와 농민층의 빈곤화는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세계식량체계로의 편입

이러한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의 결과로 우리의 농업과 먹거리는 세계식량체계(global food system)에 빠르게 편입됐다. 세계식량체계는 전 세계 곡물무역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곡물메이저를 중심으로 종자, 비료, 농약, 식품가공, 식품유통 등을 지배하고 있는 초국적 자본이 결합한 소위 ‘초국적 농식품복합체’(agri-food complex)가 주도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UR/WTO, FTA 등으로 대표되는 농산물의 자유무역은 개별 국가의 국경장벽을 해체하면서 세계식량체계의 확대에 첨병 역할을 수행했고, 곡물메이저와 농식품 복합체의 지배력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시켰으며, 국내적으로는 가혹한 농업구조조정을 강요했다.

세계식량체계의 확장은 식량의 양적 부족을 의미하는 상대적·절대적 식량위기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먹거리 안전문제에 대한 질적 위협을 가중시켜 총체적 식량위기를 유발한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유전자조작농산물(GMO) 종자의 확대, 화학농업 및 공장식 축산의 확대, 장거리·장시간 이동에 따른 화학처리의 증가 등을 유발했고, 이로 인해 먹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됐다. 뿐만 아니라 농산물의 자유무역에 따른 국내 농업구조조정의 결과로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많은 중소 가족농이 몰락함에 따라 식량생산이 소비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지난 2000년 처음으로 식량소비가 생산을 능가한 이후 전 지구적으로 식량의 생산·공급 부족이 만성적이고 구조적으로 고착화되고 있는데, 빈번한 식량위기의 발생과 국제 식량가격의 폭등은 이런 구조적인 취약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식량위기는 식량수출국에 비해 식량수입국에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며, 선진국에 비해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에 더 많은 타격을 주고, 고소득층에 비해 저소득층이나 빈곤층에 더 많은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먹거리의 양극화는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빈곤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나아가 먹거리 문제는 보건의료 비용을 포함하여 사회가 부담해야 각종 비용을 더욱 증가시키는 문제로 파급되고 있다.

한국의 먹거리 위기

현행 먹거리 위기의 근본원인은 지난 20여년간 진행돼 왔던 신자유주의 개방농정과 세계식량체계로의 편입에 있다고 할 것이다. 1990년 약 43%에 달했던 식량자급률이 최근 25% 수준으로 급락했고, 농가인구는 1990년 약 715만명에서 최근 약 320만명 수준으로 반 토막이 됐으며, 이로 인해 국내의 식량 생산·공급 기반이 극도로 취약해졌다. 식량자급률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일본,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더불어 최하위에 해당하는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은 유럽 공동농업정책에 따라 역내 공급의 안정성이 높고, 일본은 40년 이상을 투자한 해외농업개발 및 국제곡물유통회사 그리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금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이 한국이 꼴찌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의 식량(먹거리) 위기는 네 가지 측면에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생산·공급 부족이라는 식량위기가 현실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식량자급률은 25% 수준으로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극도로 취약하다.

둘째, 세계식량체계로부터 발생하는 먹거리 위험에 대응하여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현행 친환경 유기농산물의 규모는 틈새시장에 의존하며 정체된 상태에 있는데, 틈새를 넘어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 있지 않다.

셋째, 취약한 생산·공급 기반과 불안정한 기상변화로 인해 농산물대란과 가격폭등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개별 국민들의 부담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도 먹거리의 가격안정을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가격정책과 제도장치는 여전히 미약한 상태이다.
넷째, 농산물대란과 가격폭등은 특히 저소득층과 빈곤층의 고통부담을 높여 먹거리의 양극화를 유발하고 건강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중장기적으로 보건의료 등을 비롯하여 복지비용에 대한 사회적 부담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대안은 ‘식량주권’

정부가 안정적인 식량확보와 식량자급률 제고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대책 부분을 해외조달 방식에 의존하는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것은 변질된 식량안보의 패러다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UR/WTO체제 이후 현재의 식량안보 패러다임은 곡물메이저가 주도하는 세계식량체계를 지탱시켜 주는 논리로 변질돼 왔는데, 식량수입국의 경우 해외조달을 통해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식량안보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지구적 식량위기와 곡물메이저의 지배구조 그리고 식량수출 통제조치 및 곡물의 투기 등으로 인해 해외조달을 통한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는 일부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틈새시장을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현재의 식량(먹거리)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적인 패러다임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높아져 왔는데, 다양하게 전개됐던 대안적인 패러다임 논의가 최근 국제적으로는 식량주권으로 수렴되고 있다. 1997년 전 세계 소농의 연대기구인 비아 캄페시나(via campesina)가 처음으로 식량주권을 제안했고, 2007년 ‘닐레니 선언’을 통해 제시한 식량주권 7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지난 2004년 유엔 국제식량농업기구(UN/FAO)는 ‘식량권 가이드라인’이라는 권고안으로 수용됐고, 2005년 유엔 인권이사회 등이 이에 대해 강력한 지지의사를 표명하면서 국제적인 대안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나가고 있다.

세계식량체계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 농업과 먹거리 체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주적 권리를 의미하는 식량주권은 먹거리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결정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먹거리에 대한 보편적 기본권으로 인식되고 있다. 먹거리에 대한 기본권은 개인과 가계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먹거리의 소비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야 하며, 먹거리의 생산자인 농민의 기본권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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