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원칙과 한국농협 Ⅱ

◆존경받을 뻔한 농협

우리나라 농협이 지난 50년간 농업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크다. 한국농업에서 농협을 빼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지금은 퇴색됐지만 고리사채 정리와 농촌의 생활물자 공급에 큰 기여를 했다.

빈민금융의 대부로 불리며 노벨상을 받았던 방글라데시 유누스 박사의 마이크로크레딧(소규모금융)운동도 따지고 보면 이미 우리나라는 1970년대 농협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농민조합원들이 매년 몇 백 만원 씩 받고 있는 농사자금이 바로 마이크로크레딧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의 농협은 존경받지 못할까? 아니 오히려 국민들에게는 조합장선거와 관련하여 부정비리의 온상으로 눈총을 받고, 농민조합원에게는 냉소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했나?

◆한국농협이 특별한 책임
사업을 잘하거나, 가만히 있는 조합원에게 정부의 정책과 제도의 도움을 받아 혜택을 많이 주는 것만 가지고는 협동조합을 잘 이끌었다고 할 수 없다. 사업여건이 변할 수도 있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조합원은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

국제협동조합연맹의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제도” 원칙을 설명하면서 “경제적 압력과 정부의 규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협동조합에 가입하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경우의 협동조합은 모든 조합원들이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협동조합을 지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농민조합원이 스스로 협동조합의 주인이며, 적극적인 참여자, 협동조합의 지지자가 될 수 있도록 농협이 제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구조의 변화, 시장의 변화에 농협이 제대로 대응할 수도 없었고, 농민조합원이 오히려 비난을 하는 조건이 된 것이다. 
협동조합 임직원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스스로 판 무덤인 셈이다.

◆“밥 먹고 합시다”…  스스로 먹칠하는 대의원 총회

농민들이 농협을 바라보는 시각은 농촌현장에서 흔히 듣는 “국밥 대의원, 갈비 이감사”라는 말 속에 훤히 드러나 있다.

농민조합원들이 이 말을 쓸 때는 “대의원이나 이감사가 제 역할을 못하고, 농협에 모여 회의라고 하고서는 점심이나 대접받고 오는 불필요한 존재”라는 비아냥이 깔려 있다. 대의원들이 쓸 때는 “대의원들에게는 국밥이나 사주고, 이감사에게는 비싼 갈비를 사주느냐· 대의원의 중요성을 알고 잘 대접하라”는 청탁성 요구가 배어  있다.

“국밥 대의원, 갈비 이감사”의 말 속에는 대의원총회가 농협의 살림살이를 계획하고 평가하는 최고의결기관이라는 의미는 없다. 단지 농협의 대의원들이 한 끼 대접받기 위한 식전의 요식행사라는 의미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러니 농협이 민주적 운영을 주장하는 몇몇 대의원들의 질문과 주장이 “밥먹고 합시다”라는 몰지각한 외침에 묻혀 버리고 좌절되는 것이다.
대의원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 현재의 대의원총회 수준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조합원의 민주적 관리
제2원칙인 ‘조합원의 민주적 관리’를 위해서는 대의원 총회의 위상을 높이고 다양한 위원회를 활성화해야 한다. 농협은 대부분 1000명 이상 많게는 1만명이 넘는 조합원이 다양한 작목을 재배하고 있는 종합협동조합이다. 조합장과 직원들의 노력만으로는 농협을 협동조합다운 협동조합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대의원 총회가 그에 걸맞는 위상과 권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조합원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대의원 총회만으로는 복잡한 의사결정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대의원들이 주도가 되는 품목별 조합원조직, 청년회, 부녀회, 원로회의와 같은 분과위원회와 사업위원회, 교육위원회, 직원평가위원회, 조합중장기발전위원회와 같은 다양한 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현재 모든 농협에 있는 분과위원회를 이런 목적에 따라 좀 더 활성화시키면 될 일이다. 분과위원회에서 이런 역할을 정확하게 나눠서 토론이 되고, 그것이 예산대의원총회에서 토론된다면 자연스럽게 “밥먹고 합시다 대의원총회”, “국밥 대의원, 갈비 이감사”라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조합장·직원의 사고전환 필요
이런 살 맛나는 대의원총회가 이뤄지려면 조합장과 직원의 사고전환이 필요하다. 제대로 가동이 안되던 대의원 총회가 다양한 조합의 현안을 직접 토론하게 되면 처음에는 당연히 그동안 숨겨져 왔던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날 것이다. 단편적인 정보로 의혹을 제기되어 직원과 조합장이 억울한 비난까지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대의원 총회로 발전하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봐야 한다. 의학에서도 질병이 치유되기 전에 더 아파지는 ‘명현현상’이라고 이해한다면 충분히 참을 수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의 5원칙인 ‘교육, 훈련 및 정보제공’의 가장 우선적인 대상자는 대의원총회이며, 조합원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행정정보도 공개하게 제도화되어 있는 나라이다. 하물며 협동조합의 대표들인 대의원총회에서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조합원과 대의원에 대한 충분한 교육기회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농협의 주인은 조합원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가 어렵다.  변화과정의 진통을 두려워하면 현재 농협이 처한 외부의 따가운 시선과 비판, 조합원이 냉소와 무관심은 절대 고쳐지지 않고, 갈수록 체질이 저하되어 나중에는 치료할 수 없는 단계로 갈 것이다.

조합원이 자발적 참여를 위한 협동조합교육의 추진과 대의원총회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은 농협이 진정한 협동조합으로 거듭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요 관문이다.

◆‘아지매 떡도 싸야 사 먹는다’
속담에는 긴 세월의 지혜가 담겨있는 법이다. ‘아지매 떡도 싸야 사 먹는다’는 속담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사업적 관계에서는 서로 이익이 되어야 길게 갈 수 있다. 협동조합도 조합원이 만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조합사업을 이용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시장과 여건이 변할 때, 농협이 제역할을 못하고, 개인상회와 거래하는 것보다 더 좋은 혜택을 주지 않으면 자연히 협동조합에서 조합원이 멀어지게 되어 있다.

3원칙인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는 농협과 거래하는 것이 다른 상인과 거래하는 것보다 혜택이 높다는 것을 증명해야 활성화된다. 그동안 농협은 이런 조합원의 편익을 계산하는 것에 게을렀다. 조합장이나 직원들이 협동조합의 성과를 말할 때 주로 “올해 당기순이익은 흑자고, 그래서 배당을 얼마 했고...”라는 천편일률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당기순이익과 잉여금배당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합원이 사업에 참여했을 때 각 사업별 편익이 계산되어야 한다.

구매사업으로 질 좋은 영농자재 얼마나 저렴하게 구입했고, 그래서 조합원의 경영비가 얼마나 줄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판매사업을 통해 얼마나 높게 판매했는지 시장의 평균가격과 비교해서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국적이 모범사례인 진주 풋고추·피망 연합마케팅 사업 1차 년도에 조합원들의 참여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1달, 1주일, 3일, 2일 평균을 계속 비교하여 조합원을 설득했고, 이 비교를 충분히 조합원들이 이해하고 연합마케팅이 성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업이 정상궤도를 타기 시작했다. 물론 담당직원이 처음에 힘들어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있어서 진주연합사업단의 노호종 단장은 8년이 지난 지금도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인 모범사례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농협간의 협동도 필요하다.
농협간의 연합사업은 어렵다는 말을 농협직원들에게 들을 때가 있다. 심지어 농협 혼자 사업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라고 주장 하는 조합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날카로운 부메랑으로 돌아간다. 농협간의 협동이 본질적으로 안되는 것이라면 농민들간의 협동은 왜 가능하고 반드시 필요한가? 농협간의 협동이 불가능하다면 협동조합이란 존재 자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실제 농협간의 협동은 상당히 일반적이다. 유럽의 대부분의 협동조합은 연합사업을 하고 있다. 연합회도 사실은 협동조합간의 협동이 제도화된 것이다. 일본은 전농이라는 경제사업연합회가 농협의 경제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 연합마케팅, 조합공동사업법인들이 속속 만들어 지면서 농협간의 협동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농협중앙회가 경제사업이 활성화되었다고 홍보하는 상당히 많은 지역이 연합사업을 하고 있는 지역이다.

우리나라 과실 브랜드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햇사레복숭아’도 농협간의 연합사업으로 만들어진 사례다. 그외에도 안성, 나주, 진주, 경주, 햇사레, 잎맞춤, 청원생명쌀, 순한한우 등이 연합사업으로 모범사례를 일군 것이다.

6원칙인 ‘협동조합간의 협동’은 단순히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농협이 연합사업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면 현재의 시장구조에서 경제사업의 의욕이나 기획능력이 상당히 낮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농협은 농촌사회의 마지막 ‘버팀목’
협동조합 마지막 7원칙은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다. 협동조합은 언제나 지역을 발판으로 하고 있어 지역이 약해지면 협동조합의 밑바탕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실제 농협의 경영여건이나 사업구조를 보더라도 면단위보다는 읍단위가, 읍단위보다는 시단위 농협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우리나라는 지역종합농협체제이므로, 지역종합농협은 다른 협동조합보다 특히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농협이 지역의 종합적인 발전에 기여해야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이제 농협은 지역경제사업이란 사업을 구성하고 농촌관광, 농촌개발 등 새로운 농촌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미 경기도 용인 원삼농협은 복지센터를 운영하며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기능을 도맡아 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일본의 농협은 지역의 복지서비스를 대행하거나 노인건강센터를 운영하는 등 아예 지역사회서비스 기능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안성 고삼농협은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여 농촌고용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완주 고산농협은 친환경광역클러스터사업을 통해 친환경 중심 지역만들기의 핵심으로 지역민의 신뢰를 얻고 있다. 

◆“성공사례의 평균이 ‘원칙’”
협동조합원칙을 말하면 원칙과 현실을 다르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많은 협동조합의 성공사례들에서 성공의 요인을 모아 정리한 것이 협동조합의 원칙이다.
따라서 “원칙이란 실행하라고 있는 것”이다. 농협이 얼마나 원칙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원칙을 현실에 적용할 것인지 노력하는 만큼 농협의 발전이 앞당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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